우리는 다른 사랑을 원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우리가 지닌 인간적 연약함을 잘 알고 그것을 용서해 주면서도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존심을 작게 축소시켜 버리지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이 가능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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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a home at the end of the world>이고 <통역사>, <웬즈데이>와 더불어 최근 가장 친숙하게 읽었던 책이다. 세 명의 사람이 사랑을 하고, 그들의 사랑이 네 번째 사람에게도 이 세상 마지막 안식이 되는 힘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죽음과 더불어, 다섯 번째 사람의-아기의 탄생도. 개인적으로 이 책을 손에 잡을 때 마다 아파있어서 약들 속에 들어있던 약간의 수면제 기운이 미친듯이 졸립게 만들었지만, 페이지 넘기는 것을 쉴 수 없게 했다. 정말 뻑뻑해진 눈알을 연신 감았다 떴다 하면서 마지막 장을 넘겼었다. 580페이지니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책이지만, 지루하게 여겨진 적은 없었다. 세 명의 주인공들 속에 모두 내가 있었다. 번역도 무리없고, 커닝햄의 전작 <hours>(세월) 보다 더 어리고 때묻지 않은 이야기들.
<이 소설은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이다. 두 남자가 어린 시절 서로에게 처음 어떻게 끌림을 느끼는지 묘사하는 대목은, 음,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긴장되었었다. 신파, 진부함이 머리속에 오갔지만, page 81쪽을 읽는 순간 나는 감동을 받아 버렸다. 두 소년의 떨림과 당황함, 끌림에 속눈썹이 파르르르 떨리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그래, 그렇지." 그가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손목이 굵고 황금빛 털이 나 있는 그의 팔이 그의 무릎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다는 듯 그냥 거기에 놓여 있었다. 바비에게 가진 관심이 언제 애정으로 변했는지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비가 내게 마리화나를 건네 주었고, 내가 그것을 받자 그는 손을 거둬 들여 왼쪽 손목 아래쪽에 있는 다갈색 점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약하게 떠올랐다. 13년 동안 자기 몸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점만은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정맥이 갈라지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그 점을 벌써 여러 번 보았었다. 바비는 놀란 표정이었다. 갑자기 낯설어진 자기 육체를 바라보는 것이 조금은 겁이 났던 모양이다. 그가 자기 육체의 자기마한 결함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가 자신의 몸을 제대로 의식하고 있으며, 내가 내 몸을 보면서 느끼는 놀라움과 혼란을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비는 두려운 듯 부드럽게 손목의 점을 만져 보았다. 아주 미세한 동작이었다. 점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 시계를 보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하고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극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바비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바비는 자아의 혼돈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방 안, 바로 여기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두려워하고 있었다.
. "우리가 원하는 게 뭔데?" "사는 거라고 생각해."
. "멍청이. 넌 까딱하면 죽을 뻔했어. 네가 그렇게 죽어 버리면 내 기분이 어땟을지 알아?" "몰라." "난 말야, 네가 죽으면, 모르겠어." 그리고 그는 너무나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리화나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절벽에서 얼음장같은 물 속으로 뛰어내릴 때보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용감한 행동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용기를 내어, 그의 팔에 손을 올려놓았다. 바비는 팔을 빼내지 않았다.
공포가 너무 커서 욕망과 구분이 되질 않았다.
. "잘 자거라" 이렇게 인사까지 하고서도 나는 여전히 방 안에서 머뭇거렸다. 내가 자기를 자꾸 바라보는 것 때문에 조나단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조나단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게 용기가 있었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지 마.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마. 날 멀리하지 않고서도 넌 온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잖니.' 나는 조나단을 임신했을 때처럼 온몸이 조나단으로 가득 차서 조용히 방을 나왔다.
. 소리의 폭풍을 뚫고 우리의 눈이 만났다. 상승기류에 붙잡힌 참새처럼 몸이 가벼워지면서 동시에 고통이 느껴졌다. 무엇엔가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과 해방감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다. 이런 음악을 들을 때는 음악의 면전에 대고 비명을 지를 수도 있었다. 음악이 우리의 팔을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 것은 있었다. 이제 내게는 비밀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옛날에 갖고 있던 비밀보다 더 좋은 것이. 그 전에 내가 갖고 있던 비밀은 내가 섹스를 두려워한다는 것과, 이웃들과 친해지려는 생가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는 것 뿐이었다.
. 나는 빵 만들기에 그렇게 열중하는 사람을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밀가루, 버터, 칙칙한 황갈색의 이스트 같은 보잘것없는 재료들을 가지고 생명 그 자체를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같았다.
. 그렇게 어린애 달래듯 하지 말아요. 감히 그럴 생각도 하지 말아요. 나한테 화를 내도 좋고, 나를 경멸해도 좋고, 나한테 권태를 느껴도 좋지만, 철없는 아내 다루듯이 적당히 달래려 드는 건 용서 못해요."
. 이야기에 열중해서 흥분했을 때 바비는 꼭 성경판매원 같았지만, 언제나 중간에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차리고 사과를 하듯 웃음을 터뜨리며 목소리를 낮추곤 했다. 그의 살갗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땀구멍 속으로 다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 일단 그녀의 팬이 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조를 지켰다.
. 클레어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저으면서 사랑이 얼마나 희귀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 "넌 너무 긴장하고 있어." 난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게 싫었다. 마치 그가 나의 성격적인 결함을 눈치챈 것 같았다. 섹스를 할 때 나는 항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나의 본능은 빨리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 섹스를 해치우고 나의 생활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나는 긴장을 풀기로 했다. 나는 문간에 서서 에릭에게 키스를 날려 보내며 "나중에 봐"라고 속삭이고 3층을 걸어 내려가 거리로 나섰다. 대개 나는 섹스를 끝낸 후 아직 젊고 생활 능력이 있으며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이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왠지 짜증이 나고 기운이 없었다. 내 본연의 모습도 느낄 수가 없었다.
. 나는 친구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그녀의 겉모습 밑에 내가 그녀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내가 사랑에 빠져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순수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클레어와 나는 비밀이 없었다. 그것이 우리 우정의 무모한 면이었다.
.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너무 잘 알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서 자신의 보잘것없는 운명이 사실로 굳어져 버릴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반면 나 자신은 그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의지에 철저하게 굴복하기 직전인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었다.
. 나는 내 삶을 뒤에 남겨 두고 에릭의 삶 속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건 그냥 물건과 조금 비슷한 인물이었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서로를 경멸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 그 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매일 매일이 똑같았고, 하루하루가 그렇게 완벽하게 닮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멋졌다. 반복되는 일상은 마치 마약처럼 모든 것에 색다른 느낌을 부여했다. 내가 만든 계피 롤빵이 알맞게 구워져 나오고 하늘에서 내려오던 비가 눈으로 바뀌는 날이면 모든 것이 충만하고 완벽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
. 아침 6시에 전화선에 부딪히는 햇살을 아무리 바라봐도 지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내 자신과 내가 연기하는 내 모습 사이의 간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엌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항상 내가 아주 작고 아이 같으며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느낌이 이상했다. 나는 내가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내 인생이 변하리라는 것을 이해했다.
.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마치 책을 읽는 사람처럼 주의를 집중해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 우리가 걷고 있는 그레이트 존스라는 이름의 거리 위에서 원더 브레드라는 상표가 찍힌 포장지가 그날 불어온 단 한 줄기의 바람에 날려 정신 나간 애완동물처럼 우리 뒤를 좇아왔다.
. 나는 안정된 삶과 충격적인 삶을 원했다. 나는 아버지의 딸이었다.
. 나는 음악의 세게 밖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쩌다가 우연히 내 옆으로 날아온 음악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 우리 인생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애써 떠올렸다.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좋은 연습이 된다.
. 식당의 지저분한 부엌에서 멕시코제 식기 세척기에 매달려 하루를 보내며 버섯을 다지고 그뤼에르 치즈를 써는 생활에 나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내가 간직하고 있는 창피한 비밀이었다.
. "저 소파는 내가 77번가에서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몇 년 전에 스티븐 쿠퍼하로 리틀 빌하고 같이. 우리는 저 빌어먹을 물건을 들고 몇 블록을 걷다가 멈춰서 그 위를 앉아 잠시 쉬고, 다시 또 몇 블록을 걷곤 했지. 그러다가 밤이 새버렸어."
(가장 낭만적인! 이 대목의 그 셋의 우글우글한 사랑과 우정 뒤로도 많은 페이지 페이지 마다 나는 밑줄을 그어댔다. 그림도 그렸고 눈물을 닦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물기가 말라 쭈글해진 곳도 있고, 곳곳에 '아름다워'라는 말을 낙서했고, 말을 잃은 소년에게 "고양이가 네 혀를 가져갔니?"라고 말하는 다정한 표현들에 깊은 즐거움을 느꼈다. 아 나는 바비와 조나단 클레어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