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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비 나눠맞기란 용량 높은 위고비 1펜을, 나눠서 4주보다 더 오래 쓰는 것이다
사진처럼 위고비는 1개(1펜)에 4주 분량의 약이 들어 있다.
1주일에 1회 투여하는 것이니까, 1펜에는 총 4회 주사약이 들어 있다는 거다. 
그리고 위고비는 0.25mg, 0.5mg, 1.0mg, 1.7mg, 2.4mg으로 용량이 나뉘어 있는데, 각 펜의 가격이 모두 동일하다.
그래서 1.0mg 펜을 사면, <1mg + 1mg + 1mg + 1mg> 이렇게 4주 맞을 것을
0.5mg으로 절반씩 나눠 맞으면 총 8주를 맞게 되는 거다.
즉, 예를 들면 "물 2리터 1병 가격=물 500ml 1병 가격"
물 2리터 가격이랑 500ml 가격이 같은 거다. 
그러면 물 2리터를 1병 사서 500ml씩 나눠 마시면 되니까 비용이 저감되는 것이다.

 주당 투여량1펜에 든 총 용액의 양 
1주~4주0.25mg1.0mg (=0.25mg X 4주) 0.25mg을 1주일에 1회씩,
총 4주간 총 1.0mg을 투여함
5주~8주0.5mg2.0mg (=0.5mg X 4주)0.5mg을 1주일에 1회씩,
총 4주간 총 2.0mg을 투여함
9주~12주1.0mg4.0mg (=1mg X 4주)1mg을 1주일에 1회씩,
총 4주간 총 4mg을 투여함
13~16주1.7mg6.8mg (1.7mg X 4주)1.7mg을 1주일에 1회씩,
총 4주간 총 6.8mg을 투여함
17주차 이후2.4mg9.6mg (2.4mg X 4주)2.4mg을 1주일에 1회씩,
총 4주간 총 9.6mg을 투여함

그런데 어떻게 알고 나눠서 투여하지?
위험한 것 아닌가? 임의로 눈대중으로 용량을 보고 주사 맞는 것인가?
그 비결은 바로 위고비 펜 특유의 방식이다. 진짜 너무나 너무나 쉽고, 안전하다
누구나 몇 분만 읽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위고비 펜의 사용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고비 펜은 위 사진처럼 생겼는데, 
펜 오른쪽 녹색 부분을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펜 끝까지 돌리면' 1회 투약할 양이 장착된다. 
저 사진처럼 0.25mg을 예를 들면,
펜을 그냥 윗쪽으로 죽죽죽 돌리면 더이상 안 돌아가는 때가 오고, 그때 버튼을 누르면 약이 들어간다.
이때, 팅~ 하면서 끝까지 돌렸던 스프링이 풀리면서 맨처음 돌리기 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돌릴 때 탁탁탁탁 하면서 눈금이 탁탁 걸리는 소리가 명료하게 난다.
그래서 0.25mg을 맞기 위해서 맨 끝까지 돌렸더니, 가령 탁탁 소리가 총 10회가 들렸다고 해보자.
그럼 5회만 돌리면 0.125mg만 장착되는 것이다. 

그림판으로 괴발개발 나타낸 것인데, 까만 것이 펜이고 빨간 것이 주사바늘이다.
38회의 눈금을 돌리면 펜 안의 스프링 같은 것이 쭉쭉 나와서 0.5mg이 투여되도록 장착이 된다.
그리고 주사 버튼을 누르면 저 스프링이 텡~ 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0.5mg 1펜을 사서 4주만 사용하는 것보다 나눠맞기를 하면 6주간 쓸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 이익인 것이다.

 1주2주3주4주5주6주
 원래0.5mg0.5mg0.5mg0.5mg  
나눠맞기 할 경우0.25mg0.25mg0.25mg0.25mg0.5mg0.5mg
눈금 칸19회19회19회19회끝까지끝까지

이렇게 나눠맞기를 하는 것이다. 
 
각 펜당 몇 회의 눈금을 돌려야 끝까지 가는지 다 세 놓은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표로 다 정리해 뒀다.
눈금을 0에 맞추기 위해서는 1칸을 딸깍해야는데, 그거 1칸을 배제한 수치인 것 같다.
(1~2칸은 크게 영향이 없어 보이는 것 같다. 위고비를 맞아 보니)
저 표처럼, 0.5 펜을 사서 0.25를 맞으려면 18칸을 돌리면 된다. (0으로 맞춘 다음부터 18칸. 처음부터 하면 19칸)
1mg 펜을 사서 나눠맞기를 해도 된다.  

0.25x4주=1.0
0.5x4주=2.0
1.0x1주=1.0

1.0mg 1펜을 사면, 총 9주를 쓸 수 있어서 비용은 절반 넘게 아낀다.
요즘 1펜 가격이 40만 원~43만 원이니까, 한 달에 20만 원 정도로 위고비를 맞을 수 있다.
(단, 한 번 뜯은 위고비는 사용기한이 6주이다. 외국은 8주인데, 국내 출시는 6주이다. 이 부분은 의사와 충분히 상의해야 한다.
그리고 위고비는 30도 이하, 냉장보관할 경우 2도~8도 사이에 보관해야 한다. 냉동되면 안 된다!)

그럼 맞을 때마다 귀 귀울여서 눈금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야 하나?
맨 처음 신경써서 눈금을 맞춘 후, 그 자리에 볼펜이나 색연필로 색칠을 해두면 
다음 번에는 그냥 색칠된 부분까지 막 돌리면 된다.
그리고 눈금 돌아가는 소리가 아주 잘 들린다. 걱정 안 해도 된다. 

위고비 처음 맞는데, 의사가 0.5mg나 1.0mg 펜을 처방해 줄까?
내 경우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니 나눠 맞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몸서리치면서 싫어하는 의사샘이 아니면 대체로 나눠맞기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처방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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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올해 초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녹내장 의심 소견이 있어서 확인해 보라더라. 

녹내장이 뭔지도 모르고 백내장은 또 뭐지? 하는 수준이어서 그럭저럭 검색해 보니, 

녹내장은 여러 검사를 통해 '진단'을 정확하게 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녹내장은 완치 개념이 없어서, 어떻게든 초기에 발견해서 그 진행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최선의 치료란다. 

서울 빅5까지 가려니 너무 오바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나마 주변에서 진단을 잘 한다는 평을 수집해서 

용인세브란스 이상엽 선생님께 갔다.

전화로 예약을 해야 해서 약 한 달을 기다려서 평일에 연차를 쓰고 갔다. 

용인 세브란스 처음 갔는데, 편안하고 깨끗하고 좋았다. 

결론적으로, 남편은 녹내장처럼 보이는 형태일뿐 녹내장은 아니었다.

(ㅠㅠ.... 넘나 다행... 이 날까지 취업 제안 받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대기하면서 바로 일하기로 결심했다. 나이들어 마음 편히 병원 다니고 하려면 돈을 최대한 많이 비축해둬야겠다는 것이 막 엄청나게 실감됐다.) 

제일 먼저 로비 접수/수납처에서 번호표를 받고 접수를 했다.

검사는 1차, 2차로 총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12시에 예약했으면, 12시에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12~2시까지 검사를 한다는 의미이다. 

그 후, 검사한 것을 토대로 선생님을 만나 소견을 듣는 것이다. 

(녹내장이 뭔지 몰라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2차 검사에서는 5개 정도 검사를 하는데, 여기에는 비급여 검사도 포함돼 있어 병원 수납부터 끝까지 약 40여만 원 들었다. (실비 청구로 25만 원 받음)

그리고 약간 어두운 검사실에 들어가서 5개인가 검사를 거친다.

검은자가 최대한 잘 보여야 해서인지 빛이 어둡다. 

여기 앉아서 호명하면 가서 검사하고, 검사하고... 완전 무슨 우주선 시설같이 대단해 보였다. 

뭔가 이런 테크놀로지로 검사 받으면 정확할 것 같은 그런 기분

기계 구경하느라 시간가는지 몰랐네

남편은 녹내장은 아니며, 그 모양이 마치 녹내장으로 의심할 수 있게 생겼다고 했다. 

녹내장은 유두함몰비율이라는 것으로 대략적인 진단을 하는데, 뭐 기준점에서 얼마나 함몰되었느냐 그런 것 같다.

0.6~0.7이면 녹내장으로 볼 수 있다 뭐 그런 것 같았다. 
0.6 이상이면 경계이므로 검사를 권유한다고 했다. 

이게 완치가 아니어서 초기에 발견하는 게 중요하니까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아 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녹내장은 완치를 할 수 없으니, 무조건 초기에 발견해서 진행을 막는 게 관건이다.

나도 할까 고민했다. 나중에 녹내장 걸리면 어쩌나 싶어서

암튼 진단을 할 때는 3차원으로 입체적으로 봐야, 진단에 유리하므로 여러 기계로 검사하는 듯하다.  

아무튼 혹시 모르니까 6년 정도 검사를 하는데, 

처음은 1년마다 검사하고, 이후 이상이 없으면 2년 기간으로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5개 전부 다 검사하는 게 아니고, 급여에 해당하는 검사를 한단다. 
이런 거 검사에 드는 비용 걱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출근하는 거 바로 결심함 ㅋㅋ

검사 끝나고 병원 아래 식당가에 가서 돈까스 먹었다. 

병원 오면 짜장면이나 돈까스 먹어야 함 ㅋㅋㅋ 

식당가도 아주 깨끗하고 맛도 괜찮았다. 아워홈에서 운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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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일 바링토니아 구입

식물을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맞벌이에다가 경험도 없어서 두려웠다. 

그러다가 우연히 바링토니아를 검색에서 알게 되었고, 내가 생각하는 '녹색잎 식물'에 가까워서 키우기로 결정

용인 남사 하훼단지를 쭉 다니면서 "바링토니아 있나요?"라고 묻고 다녔는데 다 없다고...

"원예사들은 '감자'라고 부르는데, 걔가 진짜 안 죽고 잘 자라는데 찾는 분들이 많이 없어서요."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동탄2 하나로마트 앞에 '화성로플라워' (주소: 경기 화성시 동탄순환대로27길 30)가 생겨서 구경갔더니

바링토니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2022년 9월 2일에 바링토니아 구입

가격도 굉장히 저렴했다. 

화분으로 옮겨 심는 것을 못해서, 

남사에 가서 이태리 토분인가를 사고, 흙도 사고, 옮겨 심는 서비스를 받아서 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 물을 듬뿍 줬다. 욕실에서 샤워기로 조심스럽게 축였다. 

2022년 12월 18일

약 석 달 지난 모습

바링이를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2022년 12월 22일 꽃망울이 맺혔다

구입해서 약 석 달 20일이 지났을 때 꽃망울이 맺혔다. 

이렇게 2개가 올라왔다. 

지금 보니 잎도 귀엽다.

20222년 12월 26일

꽃이 피지 않고 뚝 떨어져버렸다.

원래 이런 것인가 했다.

개화하지 못했다.

감자가 까매져서 썪는 것인가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 

2022년 12월 29일 두 번째 꽃이 피기 시작

두 번째 꽃망울에서는 꽃이 피기 시작했다.

2022년 12월 29일 오후 11:06

밤에 핀다고 하더라. 

 

2022년 12월 29일 오후 11:24

꽃이 피는구나! 했는데

18분만에 뭔가 쑥 펼쳐지더라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꽃이 뚝 떨어져 있었다.

2025년 2월 16일

그로부터 2년쯤 지난 올해

2월에 꽃망울이 엄청 올라왔다. 

전부 다 개화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렇게 꽃이 떨어져 있었다. 

2015년 2월 17일 오후 6:34

이렇게 꽃잎 겹에서 나오기 시작

2025년 2월 17일 오후 7:32

50분쯤 지나자 꽃이 피기 시작

2025년 2월 17일 오후 11:19

3시간 50분쯤 지나자 기지개를 펴더라

이거 찍고 싶어서 계속 지켜봤다. 

너무 기특하고 예쁘다. 

다음 날 아침엔 꽃이 뚝 떨어지고 저런 흔적이 남는다.

2015년 2월 28일 오전 04:22

새벽에 일어나 보니 다른 꽃이 폈다. 

바링이도 사왔을 때보다 훌쩍 커져있다. (그 사이에 화분도 이케아에서 새로 큰 걸로 사서 바꿔주었다.) 

봄이 오던 때에 이렇게 여러 개의 꽃으로 우리집을 기쁘게 해 준 바링토니아

정말 튼튼하게 잘 커서 보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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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은 1신도시와 2신도시로 개발되었는데, 그 중간이 경부 고속도로로 단절돼 있었다. 
동탄역을 등에 지고 남쪽을 바라 보면 위와 같이 왼쪽은 동탄2이고 오른쪽은 동탄1 신도시 쪽이다.
그래서 경부를 최대한 동탄역 쪽으로 붙여 직선화하면서 동시에 위에 뚜껑을 덮어 지하화하는 개발이 시작되었다.
동탄이 지대가 높고 경부가 낮은 상황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경부가 지나가는 터널 상부로는 공원을 만들고, 경부가 사라진 땅은 상업지구로 개발하는 것이다. 
위 사진처럼 경부로 인해 주변 땅은 거의 맹지화되어 있었는데, 
이 단절이 해소되면서 동시에 저 땅은 동탄역(SRT, GTX-A, 동탄인덕원선4호선)과 함께 가치가 상승한다.

역시 남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불과 6개월 전에 경부 하행은 지하화되지 않은 상태다. 
경부가 상당히 지대가 낮고 도시 쪽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반대로 남쪽으로부터 북쪽을 바라 보는 방향이다. 
이제 터널로 들어갈 상행과 하행이 보인다.
상하행이 지하화가 되면 저 사진의 왼쪽 도로는 사라지고 일부는 상업용지로 개발된다.

북쪽을 향해 본 방향
하늘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지하 경부도로가 된다.

북쪽을 향해 본 방향
오른쪽에 경부가 완전히 지하화가 되었다. 그리고 옆 작은 산을 깎고, 과거 경부고속도로는 모두 없애 버렸다.

경부 지하화가 완료된 상황이다.
남쪽 방향으로 본 모습이다. 
과거의 경부를 없앤 땅은 상업지역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자막이 틀렸다. 1968년에 착공하였다니... 암튼)
이제 지하화가 완료되고, 그 위 부지 평탄화가 많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많이 평탄화되고 구획 나뉜 게 확연하다. 

경부는 완전히 지하로 갔고, 그 위는 공원이 되고, 과거 경부였던 곳은 다 깎고 평탄화하여 가치 높은 땅이 되었다.

이렇게 공원이 된다고 한다. 조감도의 공원 오른쪽의 빌딩들은 상업개발지에 들어오리라 예상하는 그림이다. 

동탄역이 지척인데, 서쪽에서는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300m를 가기 위해 3km를 돌아 가야 했는데, 그 도로가 적어서 정체가 아주 심각했다. 
걸어서 5분인데, 차로 가려면 2-30분이 걸리기도 했다.

동탄역 서쪽에서 바라보는 동탄역과 경부 상부

도로 개발이 거의 완료되고 동서 도로 개통만 남은 상황인 상황

도로가 하나로 이어졌다. 
경부 상부 위에 도로가 쭉 뻗게 되었다. 8월 29일 개통함

동탄역쪽에서 저 멀리 메타폴리스 쪽으로 경부 위로 도로가 단절되지 않고 쭉 이어지게 되었다. 

야경도 밝혀짐
일단 경부 위 총 6개 중 2개의 주요 도로가 개통되었고,
나머지는 2024년 12월에 완료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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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 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공연이었다.
서울 공연 예매 실패로 포기할까 하다가
그냥 남편과 전주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겸사겸사 전주 나들이도 할 겸..

<소감>
베토벤을 아름답게 쇼팽을 웅장하게 치는 느낌

누가 조성진을 이렇게 평가했는데
정말 정확한 것 같다.

직접 공연장 안에서 들으니 더 좋았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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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에서 저마다 '중도', '중도', '중간 지대'를 말한다.

과연 중도는 존재하는 것일까?

 

평소에는 특정 정당 지지자도 아니며, 특정 후보 지지도 하지 않고,

이념적으로도 딱 중도인 그런 '부동층'이 언론에서 말하는 '언론형 중도'에 가장 가까운 개념일 것이다.

 

그래서 부동층에 대한 좋은 논문이 있어

간단히 결론만 요약해 보았다.

 

출처는 '한국 부동층의 특성과 부동층을 대상으로 한 선거운동 효과'(문은영, 건국대학교 대학원,[2016] [국내박사])로 

지방선거, 총선, 대선을 모두 몇 년간 분석하여 통계를 낸 자료를 싣고 있다.

이러한 통계가 몹시도 귀하므로 이 통계만을 요약해본다.

직접적인 자료는 http://www.riss.or.kr로 로그인해 논문을 찾으시면 된다.

무료로 볼 수 있다.

 

 

부동층이란?

<선거운동 시작부터 선거일까지 투표결정을 하지 못한 사람들, 혹은 이 기간에 지지후보를 변경한 사람들>을 뜻한다.

 

 

부동층은 과연 ‘중도’인가? 그들은 어떤 유권자인가?

 

 

통념1.

부동층은 고정층에 비하여 젊은층이며, 정치적 지식과 정보가 부족한 교육수준이 낮은 유권자일 것이다.

 

⇛ 부동층은 고정층에 비해 더 젊은층이다!

고학력일수록 부동층이 더 많다!

 

부동층과 연령

부동층과 연령 분석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로 나타났다. 부동층 중에는 젊은 유권자의 비율이 컸다. 50대 이상 장년층으로 갈수록 고정층의 비율이 높아진다.

20대와 30대는 “부동층 비율 > 고정층 비율”

 

부동층과 교육수준

부동층은 정치적 지식과 정보가 부족한 교육수준이 낮은 유권자는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결과들이 있어 100%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고학력일수록 고정층에 비해 부동층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투표결정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쉽게 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권자 자신의 기준과 후보, 그리고 최종 투표 선택 사이에 많은 가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갈등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유의할 대목은, 기권층 역시 고정층에 비해 더 젊으며 고학력자라는 사실이다. 즉, 부동층은 고심과 불신 사이에서 정치적 차선을 선택하는 부동층이 되거나, 결국 투표를 포기하는 기권층이 된다.

 

 

통념2.

부동층은 지지후보를 변경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 부동층은 지지후보를 변경할 가능성이 높았다!

 

부동층과 지지후보 변경경험 여부에 관해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했다.즉, 부동층은 고정층에 비해 유동적인 면을 보인다.

 

 

통념3.

부동층은 무당파(지지 정당이 없음)이거나 정당지지 선호가 약할 것이다.

 

⇛ NO, 부동층은 지지 정당이 상당히 있는 사람들이다.

 

부동층은 지지 정당이 없는 사람들일까?

 

부동층은 고정층보다는 낮지만, 특정 정당과의 정당일체감이 상당히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건 매우 중요한 데이터인데, 즉, ‘선거운동 시작부터 선거일까지 투표결정을 하지 못한 사람들, 혹은 이 기간에 지지후보를 변경한 부동층’도 특정 정당에 일체감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정당일체감이 상당히 있음에도 내가 일체감을 느끼는 정당이 공천한 후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선거장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고민한다는 것이다. 혹은, 특정 정당과 정당일체감이 있지만 투표는 다른 당의 후보에게 투표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도’가 얼마나 허상인지를 잘 보여 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와 달리 투표를 기권해 버리는 기권층은 특정 정당과의 정당일체감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소위 말하는 ‘중도’이다. 역시, ‘중도’는 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통념이 데이터로도 밝혀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통념적으로 ‘부동층은 지지정당이 없는 무당파다’라는 명제는 이제 옳지 않은 명제임이 드러났다.

 

부동층에게도 당파심은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부동층은 정당지지와 괴리된 존재가 아니라, 지지 혹은 선호하는 정당이 있음에도 쉽게 투표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등하고 고심하는 유권자라는 것이다.

 

 

통념4.

부동층은 이념적으로 중도적 유권자일 것이다.

 

⇛ NO, 부동층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념을 선택한다.

 

대선 부동층을 분석한 결과, 15대 대선에서 부동층은 보수적 성향을 보였고, 16대 대선에서는 진보적, 17-18대 대선에서는 중도적 성향을 보였다.

총선 부동층의 경우 16대 총선에서는 중도적, 18대 총선에서는 보수적, 19대 총선에서는 모름 혹은 무응답으로 답하여 이념적 일관성은 보이지 않는다.

지방 선거도 마찬가지이다.

즉, 분석 결과 지선, 총선, 대선에서 부동층은 모두 일관되지 않은 이념적 성향을 보인다.

즉, 부동층은 이념적 중도가 아니라 시대적 흐름을 타는 존재들이다.

 

이와 달리, 기권층만은 일관적으로 이념적 중도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념적으로도 중도이며, 지지 정당이 없는.. 언론이 소위 말하는 ‘중도’는 기권층을 뜻한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통념5.

부동층은 지역주의 영향을 덜 받을 것이다.

 

⇛ NO, 부동층은 지역주의 영향을 받는다.

 

부동층은 영남지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

호남지역만이 부동층보다 고정층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17대 18대 대선에서는 호남에서도 부동층이 고정층보다 더 많이 나타났다.

결론적으로는 지역주의 색깔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부동층이 특정 정당에 상당한 정당일체감을 갖고 있으며, 이념적으로 중도가 아니라는 위 데이터와 더불어 부동층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러한 ‘무념무색의 중도’가 아니란 점을 잘 보여 준다.

 

 

결론

이제, 부동층이 소위 말하는 ‘중도’가 아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부동층은 이념적으로도 중도이며, 지역주의 영향도 받지 않으며, 교육수준도 낮고, 무엇보다 정당일체감(정당 지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부동층은 정당 지지가 있음에도 마지막까지 고심하는 유권자들이다.

이들은 정치적 관심이 높고, 정치적 효능감도 높아서 자신의 효능감을 높이고자 투표에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그래서 정보수집에 더 적극적이다.

 

 

출처

한국 부동층의 특성과 부동층을 대상으로 한 선거운동 효과

문은영, 건국대학교 대학원,[2016]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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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사극 '정도전'을 정말 뜨겁게 보았다.

그리고 현재 방송 중인 '육룡이 나르샤'도 즐겁게 보고 있다.

정도전이 '정도전'에 주목한 이야기라면, 육룡이 나르샤는 '이방원'에 주목한 이야기인 것 같다.

 

나에게 늘 긍지와 자부심을 주는 '조선'은 어떻게 기획되고 탄생했을까.

기회만 된다면 조선의 정치, 철학, 예술에 대한 많은 글을 쓰고 싶다.

(조선 후기는 그리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

 

요즘 정치를 보다보니...

정도전이 개혁을 이루어 나간, 그 과정을 야당 정치인들이 되새겨 보면 좋을 것 같다.

(여당엔 기대 하지 않음. 왜곡만 하지 않아도 감사 감사 대감사..)

 

 

 

들어가며

 

정도전은 군주로 대변되는 한 사람에 의해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은 올바른 시스템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가 기획한 조선은 재상과 관료가 중심이 되어 국가의 질서가 유지되는 나라였다. 국가의 체계를 세우면, 세습으로 유지되던 절대 권력이 이러한 체계 속으로 편입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절대 권력을 지닌 한 사람이 아닌, 사회 질서 시스템이 갖춰지면 어떠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가 대응 과정을 예측해볼 수 있기 때문에 정도전의 이러한 기획은 근대 사회로의 기획이었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건설을 위해 정도전은 국가수준의 군사훈련의 병법과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정비하였는데, 군사력과 관료제가 근대 국가의 필수 조건이라는 학계의 정설을 떠올려 본다면 정도전이 국제적으로도, 또 국내적으로도 시대의 요청과 상황을 잘 헤아린 것을 알 수 있다.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바꿀 정도의 국가를 설계, 건설하였다는 점은 정도전의 식견과 통찰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말해 준다. 그리고 시스템을 설계한 뒤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은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고 생각된다.

정도전이 어떻게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다 따져보는 것은 한계가 있고, 다만 사료 상의 문언들을 중심으로 그 빈 공간들을 추론해서 채워볼 뿐이다.

 

 

고려의 현실을 체험하다

 

 

두 가지 개혁

 

정도전이 바라본 고려 말의 정치상황은 한마디로 위기 상황이었다. ‘위기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 경제의 파탄, 도덕의 부패, 힘의 균형의 파괴가 모두 나타난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도전이 문제로 삼은 것은 정치경제의 위기였다. 그래서 먼저,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 시스템을 혁신하고자 하였고,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토지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정도전이 구상한 정치 시스템 개혁의 내용은 사유화된 권력을 막기 위해, 안정적인 정권과 공동체 질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왕 혼자서는 국정을 운영할 수 없기에 교육받은 전문 선비들이 역할별로 실무를 하고, 재상은 이를 관장하는 재상 정치가 그것이다. 권력을 한 사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분산시켜 시스템이 정치를 제어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훗날 정조 초기에 세도정치가 판치는 것을 보고 정약용이 관료 중심의 집단 정치체제를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음으로 정도전이 구상한 경제 개혁의 내용은 토지를 공전제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생업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생업인 농업을 하기에 권문세가가 전국의 토지를 소유하여 백성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현실이 고려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공전제로 전제 개혁을 하고자 한 것이었다.

 

 

정치가 정도전

 

이러한 개혁은 현대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탁월하고 구체적인 기획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권과 권문세가 모두를 설득시켜야 이러한 개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국가 시스템을 개혁하고 정비하고 개선하는 것인데, 온 나라 사람이 힘을 모아도 성공적으로 실현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정도전과 뜻을 모은 몇 몇 무리로는 이 기획을 시작하기도 어려웠다. 현재에도 개혁이 이루어지기 어려운데, 당시 정도전은 세력도 하나 없는 변변치 않은 집안의 선비일 뿐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이 선택한 전략이 척불, 배불주의였다.

 

1388년 그의 나이 46, 우왕 14년에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중앙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준 등과 함께 과전법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전략으로서의 배불론

 

사대부의 명분을 세워주고, 권문세가에 경제적 이익을 어필하다

 

당시 정계의 주류 세력인 사대부들이 성리학자들이어서 정도전은 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명분으로 성리학은 정통이고 불교는 이단이라는 전략을 쓴다. 당시 사대부들은 이념적으로는 성리학을 추종하였지만 현실이나 삶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였다. 이색만 하더라도 집에 극락세계를 기원하며 불경을 외우는 백련회를 설치할 정도로 불교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배불론을 전개하면서도 정도전이 불교에 대해 주로 비판한 부분은 윤리적인 측면이었다. 이를 테면 불교는 아버지를 섬기는 도리가 없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없다고 한 것이었다. 이런 전략으로 사대부라면 성리학적 사상을 따라야 하고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는 명분을 세운 것이었다. 배불이라는 사상으로 사대부의 결속을 다진 것이다.

그리고 권문세가들의 지지를 받고자 불교로 인해 세금이 적게 걷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불교로 인해 젊은 남성이 역을 감당하지 않고 산 속에서 수행하기 때문에 국가의 노동력이 약해졌다는 것이었다. , 불교를 없애면 많은 사람들이 노역을 할 것이고 그렇다면 세금이 더 많이 걷혀 권문세가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이 권문세가들이 정도전의 배불사상에 동의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정도전이 불교를 부정적으로 취급한 것은 단순히 그가 성리학이라는 정통 사상을 순수하게 추구하여서라기보다는 배불론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 그가 성리철학자였기 때문에 진보적 사회개혁 사상가가 되고 배불주의자가 되었다기보다는, 반대로 진보적 사회개혁 사상가였기 때문에 성리학자가 되었고 열렬한 배불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다.(한영우, 정도전사상의 연구, 서울: 한국문화연구소, 1973/증보판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이렇게 정도전이 고려말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불교 배척을 화두로 삼아 당시 정쟁의 중요한 문제로 만든 것은 그의 정치적 능력이 출중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 인해 정도전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되었고, 동시에 또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신돈과 같은 불교계의 위협 세력의 성장을 예방하는 두 가지 실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조준을 전면 등장시키다

 

회군 이후 정도전은 배불론이라는 명분으로 사대부와 권문세가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다방면에 걸친 개혁에 착수한다. 회군 직후 13887월 조준의 상서를 발단으로, 8월에 전국에 걸친 양전 사업, 2개월 후에는 급전도감이 설치되고, 1389년에 양전이 완료, 1390년 정월에 신전적이 반포, 13915월 과전법 제정으로 전제개혁이 일단락되었다.

민수를 헤아려 토지를 지급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전제개혁을 주도한 것이다. 과전법은 정도전이 최선의 모델로 삼았던 고대 중국의 공전제를 실현한 것은 아니었지만 온 나라가 기뻐하고 민심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 추진 과정에서 이색, 권근, 정몽주와는 끝내 갈라서게 된다. 위화도회군 이후에는 스승인 이색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개혁의 전면에는 조준이 등장하는데 이는 정도전의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1375년 그의 나이 33세에 이인임의 친원 정책에 반대하다가 나주 회진현의 거평 부곡에 약 3년간 유배되고, 중앙으로 복직되지 못하고 이후 4년간 고향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이후 바로 동북면의 이성계를 찾아가 이후, 이성계를 위해 헌신하며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게 된다.) 정도전은 이인임에 도전하여 유배를 당한 후 고초를 겪고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토지개혁은 조준 대 이색의 대결로 보이게 하고,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정도전에게 전제개혁은 단순히 토지제도를 개선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말 토지제도하의 정치권력 자체를 혁파하고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는 것이었다. 이토록 중요한 토지개혁을 성사시키기 위해 매우 예민하고 기민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정몽주의 반대로 전제개혁이 성사되지 못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과정에서 전제개혁은 성사되지 않았다. 과전법을 실시해 전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이성계파(조준, 윤소종, 정도전)와 이 개혁을 반대하는 정몽주파(이림, 우현보, 변안열, 권근, 유백유, 이색)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개혁파들 대개가 유배를 가고 말았던 것이다.

, 토지개혁이 정몽주파에 의해 성사되지 못하자 정도전이 비로소 정도전은 정쟁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하지만 곧 정도전은 탄핵의 표적이 되어 좌천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 (!)

정도전이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후, 조정의 주도권은 정몽주와 이색, 그리고 이성계가 병존하는 연립정권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립정권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성계의 군사력을 염려한 정몽주가 13924월에 이성계파의 주요 인물들(조준, 정도전, 남은, 윤소종, 조박, 오사충 등)을 유배시켜 버린 것이다.

비개혁파들은 정도전의 신분이 낮고, 가풍이 문란하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인신공격의 형태를 띠는 소를 올렸고, 이 결과로 개혁파였던 조준, 남은, 남재, 조박, 윤소종은 귀양을 갔다. 당시 정도전은 이미 봉화에 유배 중이었는데 이런 상소들로 인해 예천의 감옥에 까지 가서 투옥된다. 이때 정몽주는 정도전의 외가 혈통, 즉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노비이므로 정도전을 벌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정몽주(鄭夢周)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이확(李擴) 이내(李來) 이감(李敢) 권홍(權弘) 유기(柳沂) 등을 사주하여 상소하기를,

“정도전은 천지에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의 지위를 도적질하고, 천한 근본을 가리고자 하여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혼자 할 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을 연좌하였으니, 청컨대 귀양 간 곳에서 처벌하여 후세에 경계가 되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고려왕조의 중흥을 포기하고 혁명의 실행에 들어가다

 

1388년 그의 나이 46세에 위화도 회군을 기획하고, 과전법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3년 뒤에 경북 봉화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런데 1년 뒤, 유배 중에 투옥까지 된다. 이 시기에 정도전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자신의 뜻이 같은 사대부였던 정몽주파에 의해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배 중임에도 옥에 갇히기까지 한 정도전은 이때 고려는 단순히 개혁으로 바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굳게 결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고려왕조의 전면 부정, 곧 새로운 나라를 건국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닐까 한다.

이후 행보는 모두가 알다시피, 변방의 무장 이성계와 정치 낭인인 정도전이 만나 혁명은 변경으로부터라는 말을 실감시키듯 혁명을 이룩하게 된다.

, 그가 옥에 갇힌 해에 정몽주가 피살되어 정도전은 풀려나고 이 해 7월에 이성계를 신왕조의 왕으로 추대한 것이다. 이로써 475년에 이른 고려왕조는 종언을 고하고 조선이 건국된 것이다.

 

 

대항엘리트, 백성을 위한 엘리트, 정도전

 

전략으로서 배불론을 주장한 것 외에도, 거침없고 타협없는 개혁 의지는 단순히 정도전이 성리학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정도전을 성리학자로 보기보다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정치가이고 관료라고 보는 시각이 더 많다. 이에 대해 김석근은 그는 전형적인 성리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타고난 반항아이자 동시에 혁명아이며,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모티브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였다.

 

정도전이 이토록 급진적인 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던 동력은 출신이라고 보이기도 한다. 그의 가계에는 천민의 피가 섞여 있었다.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승려 김진이 우씨 가문의 종의 아내를 간통하여 낳은 딸이었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과거 합격 뒤에도 한동안 임명장을 받지 못하였다. 또 우왕 원년에 유배되었던 다른 개혁파들과 달리 정도전은 10년 동안 복직되지 못하였다. 한영우 역시 이 점을 중시하고 있다. 그는 정도전이 평생 해결하지 못하고, 죽어서도 풀리지 않은 것은 혈통문제였다. 이 점은 그의 사회개혁의 방향이나 인격의 형성, 나아가서는 동료 사대부와 결별하여 학자에서 혁명가로 전환하는 이유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고려왕조 하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보았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혁명을 꿈꾸는 대항엘리트로 변하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른 하나는 백성의 발견이다.

정도전은 유배지인 나주 소재동에서 천민들이 매우 유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성길이란 자는 약간 글자를 알았고, 그 아우 김천은 담소를 잘했으며, 서안길은 사투리, 속담, 여항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남기고 있다. 그리고 정도전이 본 부곡민들은 훌륭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또 정도전을 성심으로 위로해주었다.

이에 정도전은 마음 깊이 감동하여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은 성리학자로서의 정도전이 가진 학문적, 정치적 태도에 근본적인 전환을 초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과 지배엘리트들이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백성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배움을 받는 이것이 정치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이며 정치가들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자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민의 마음을 얻으면 민은 복종하지만, 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민은 임금을 버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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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염으로 휴일에 병원을 가게 되었다.

휴일에 진료하는 근처 병원을 검색하다 보니 이수역 근처에 내과가 하나 있더라.

가서 진료를 받고 집으로 좀 걷고 싶어 두서 없이 걸었다.

날씨가 정말 화창하고 좋아서 햇살을 좀 쬐고 싶었었다.

남편과 계획 없이 낯선 동네를 두런 두런 걸었다.

이수역에서 내방역쪽으로 한 5분 걷다보니, 방배초교 입구 사거리가 나오고 효령로로 가는 안내판이 나오더라.

 

걷던 방향에서 우측으로 해서, 동네 골목을 들어가니 '도구로'라고 하더라.

방배 5동이라던가...

예전에 한지붕 세가족이라는 티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드라마에 나올법한 정겨운 동네길이 쭉 이어졌다.

 

도로를 따라 걸으면 효령로 큰 대로만 나올지 알았는데,

나트막한 산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더라.

도로 가로수로 벚꽃이 있어서, 제대로 벚꽃놀이를 즐겼다.

 

 

 

정신없이 복잡하기만 한 사당역 이수역 근처에 이런 산길이 있었다니...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며 한 컷

 

 

 

 

이렇게 산을 하나 넘어가는데 걸린 시간은 10분 정도.

천천히 걷는데 참 좋았다.

러닝을 할 수 있게 푹신한 인도도 조성되어 있고.

봄볕이 좋아 산책을 나온 주민들이 많았다.

 

 

 

 

이제는 내리막

 

도로 양 옆으로 벚꽃, 개나리가 만발했다.

 

 

  

길 끝이 다가오니 괜스레 아쉽기만 했다.

 

방배역으로 나와서 집으로 가는데 참 기분이 좋았다.

아픈 것도 금세 낫는 기분이었다.

 

 

<없는 솜씨지만, 산책길을 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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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 근처 1호선 양원역 바로 앞에 있는 중랑숲

 

 

 

 

 

 

 

캠핑장도 갖추고 있는데 가족끼리 오기 좋다.

 

 

 

 

 

시설도 깨끗하고 조용하다.

 

 

 

 

 

 

숲 조성을 정말 잘해두었다.

 

 

 

 

 

 

 

 

 

 

 

중랑숲 카페는 매점 겸 캠핑용품 판매소인데 없는 게 없다.

얼음을 사서 봉지에 담아 맥주를 보관!

 

 

 

 

 

 

저녁으로 목살과 망고새우 샐러드 그리고 소고기느님

고기를 굽는 손은 아가씨 서방님

 

 

 

 

 

 

 

캠핑의 묘미는 해가 진 이후부터!

고즈넉하게 해가 지기 시작하면 세상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면서 평화로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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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캣에서 포토북 주문했다. http://www.smilecat.co.kr

A4로 하다가 이번엔 A5로 했는데 한 손에 들어오는 것이 더 좋았다.

 

표지

 

한 손에 쏙~

 

 

첫 장이다.

 

 

60페이지로 주문했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일단 질이 좋다.

한권 한권씩 모아가는 재미도 있고.

 

 

이번엔 내가 디자인하는 컨셉으로 해서, 깔끔하게 구성해봤다.

 

 

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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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제주도를 다녀온 사진들과 여러 다녀온 곳들 중 간직하고 싶은 것들을 모아 포토북을 한번 만들어 봤다.
하드커버로 A4로 만들었다. 가로가 넓은 와이드형으로도 해서 동화책처럼 해보고도 싶었는데
그래도 책형태가 제일 낯익어서 A4로 했다.
책장에 끼워놓기도 좋고.
받고나서 좀 놀랍기도 해서 꺅! 소리를 질렀다.
정말 신기했다.
스마일캣(http://www.smilecat.co.kr)에서 A4 포토북, 60페이지로 주문했는데 5만원 좀 안되는 가격이다.
주문한 다음 날 배송이 왔는데, 포토북이라 그런지 박스에 담겨왔다.
쿠폰도 여러 개 오고 포토북 리뷰를 쓰면 5천원 까지 적립금도 주고,
사진인화 초기부터 시작한 벤처라 믿고 주문.

커버.
A4를 화이트나 블랙으로만 하고 사진만 덩그라니 있는 게 의외로 볼품없어서, 그냥 디자인 툴을 따랐다.
요즘 한창 유행인 중2병 느낌 물씬나는 홍대풍의 빈티지인데, 더 늙기 전에 그런 유행에 동참해 보려고 골랐다.
의외로 '심플 블랙, 심플 화이트' 이런 게 좀 더 무게잡는 유치함 같아서 이 편이 훨씬 이쁘다.
난 저 흔들리는 숲 사진(제주도)만 끼워 넣었다.
편집툴이 잘 돼 있어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포토북에 넣고 싶은 사진을 골라내는 것이 제일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다. 흐흑 
일단 사진을 큰 사이즈로 골라 놓고, 편집하니 금세 되었다.
흰 바탕에 하늘색 땡땡이, 토끼풀을 셀로판 테이프로 붙여 놓은 모습 이런 게 모두 이쁘게 잘 나온다.
표지는 맨들맨들... 으 좋다 ㅠㅠ


첫 페이지
사진 석장을 골라 넣었다.
merry land, 이런 문구는 대충 생각나는대로 적었다.
평소 좀 생각해 둘껄 ㅋ


여러 번 넘겨도 단단하게 제본되어 있다. 하드커버와 내지가 공간이 있어서 내지를 꽉꽉 눌러대도 떨어지지 않는다.
포토북은 소장용이 대개의 목적이니 만족.


왼편 사진이 아이폰 3gs로 찍은 원본이다.
원본 그대로 넣었는데 만족스럽다.
사실 아이폰 3gs 사진이 저 정도 퀄리티로 나온다면 국내의 모든(!) 폰 사진도 가능할 듯.
(흐흑)


편집 페이지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
꼭 해 보고 싶었던 거다.
나도 잡지처럼 ㅠㅠ 양면 모두 하나의 사진으로 꽉 채워보고 싶었다.
사진에 따라 느낌이 천차만별이니 대형으로 만들어도 느낌 주는 사진으로만 해야할 것 같다.
편집할 땐 몰랐는데 의외로 작은 사진들이 이쁘다.
이 사진은 속초 설악산에서 찍은 것인데 도시에서 살다보니 산이 너무 그리워서 크게 보고 싶었다.
난 산골, 시골 사람이라 저렇게 집 밖에 산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나' 답게 되는 것 같다.



다른 편집 페이지.
하나의 사진을 세 동강 내서 편집해 봤다.
지루하지 않고 느낌이 좋다.
같은 사진인데 사진가들 사진집 따라서 했는데 잘 구현되어서 만족.
저 산은 산이 아니라 제주 오름이다. 찍은 장소는 다랑쉬 오름.


편집할 땐 '너무 작아서 어쩌나' 했는데, 받아보고 나니 정말 만족스러운 작은 사진들 모음.
A4라서 그런지 전혀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서 없는 사진들을 모아놓아 액자처럼 실으니 그 자체로 감각있는 새 사진같아서 신선했다.
내 사진들이 감각있다는 것이 아니라;;;;


양면에 하나씩 해봤다.
이 둘 사진은 내가 아끼는 '기억'이다.
소중한 기억이다.
예테보리(스웨덴)는 가장 사랑했던 도시였다.
여러 번 틈만나면 가다보니 아직도 그 도시를 처음 만났던 공기까지 생생하다.
이런 내 애틋하고 그리운 기억이 사진에 담겨있다.
싸구려 카메라에 얻어모은 필름들...



썰렁한 것 같아서 신호등이 있는 그래픽을 넣어 봤는데 이쁘다.




파리, 욘쇼핑, 런던.
욘쇼핑에서는 그냥 저렇게 나무 아래에서 결혼사진 찍었다.
서울은 소돔과 고모라같다.



제주 오름. 아이폰 3gs로 찍은 것을 A4 한 면으로 담았다.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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