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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자인 팩토리 - 카페
참고한 곳: http://blog.naver.com/melonbin/140067069787


햇살이 환하다.
낮 1시 모든 곳이 조용하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연암으로 가지 않고 이 골목을 들어섰다.
이런 곳들이 있는지 몰랐는데 신기했다.


아아 이 착한 가격 T-T...


카페 테라스에서 보이는 풍경. 어느 집 대문 위.


연락이 된 친구가 달려오고 있다. 으크크큭 귀여운 것. 파파라치처럼 찰칵~

2. 프란체스코 (동성로점) - 이탈리아 음식 전문점


아는 목사님 피로연을 이 곳에서 했을 정도로 자주 가던 곳이다.
가격도 정말 저렴하고 (이탈리아식 피자가 8천원 선, 삼청동이나 청담 못지 않음!, 스파게티가 6~7천원 선이다. 정말 맛있는 곳이다. 젊은 시절 유학을 다녀오신 패션학과나 의상학과 교수님들도 여기는 인정!) 3층 짜리 건물이 널찍해서 갑갑한 느낌도 없다. 너무 트랜디하지도 않고 너무 노회한 스타일도 아니어서 아기 엄마들도 아기들 데리고 와서 밥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하다. 자꾸 이야기하지만 정말 맛있는 곳이다. 여기서 이태리 피자 먹다가 서울에 처음 와서 가로수길에서 2만원 짜리 먹었을 때 돈 아깝고 속이 부대끼고 그랬다. 음료들도 3천원이면 되는데 직접 모든 것을 다 하고 원재료들의 맛이 풍부하고 좋다.
먹느라 음식 사진은 없군...
(위치는 수성구와 동성로 두 곳인데 검색해 보면 나옴 --; )

3. 도심 속 바닷가 - 대구시 동구 용계동 횟집

포항까지 고속도로가 뚫려 1시간이면 간다. 그래서 회를 먹으러 포항에 가곤 했었는데 아버지가 알아둔 곳이 있다신다. 차를 타고 가니,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횟감을 사서 그 자리에서 먹는 곳이 있었다. 회만 사면 알아서 테이블로 서빙이 되고 자리세라거나 초장, 밑찬(계란찜, 해파리무침 등등), 매운탕값은 무료다. (매운탕은 2천원에 포장으로 파는데 이것 2끼는 먹을 정도로 양이 많고 제대로다.) 회도 엄청 싸서 나는 정말 감동했다.


횟감을 고른다.

이 곳에서 썰고 계심.


우럭, 광어 합쳐서 4만원이 안된 것 같다.


낙지 두 마리도. 이건 마리당 6천원.


으아 ㅠ_ㅠ.. 좋아라.
나 말도 안하고 먹음...


포장만 해서 갈 수도 있다.
뒤 쪽 주차장이 넓어서 주차 문제는 없음.


처음에는 수산만 하다가 산지 직송 화로구이도 옆으로 확장.


얼마 전 봉천동의 '강강술래'에 고기를 먹으러 가서 양지 국거리를 파는 걸 봤는데 30% 할인해서 300g에 1만 500원이었는데... 600g에 15,000원.



입구를 들어가면 오른쪽이 화로구이.
왼쪽은 회센터.


테이블석이 50테이블 정도(?), 그리고 좌식 코너와 방도 있었다. 방은 예약을 해야 할 듯 하다. 토요일 저녁이었는데 대기 순번표를 받고 사람들이 대기석에서 줄을 설 정도였다.
서비스는 정말 신속하고 친절했고, 일식집과 달리 (당연히) 조금 시끄러운 것이 아쉽긴 했다. 그래도 우리 식구 넷이서 5만 6천원에 회로 배불릴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어서 1차는 여기서 하고(?) 2차는 팔공산 동화사에서 조용히 가졌다. 동화사 분향소를 겸사겸사 들르면서 길다방에서 커피 한 잔씩.

4. 부산안면옥 - 여름에만 여는 냉면 전문점


50미리 렌즈를 잘 못 다뤄서 이런 샷이;;
가정집을 개조한 냉면집. 대구 노보텔 옆에 있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으면: http://blog.naver.com/crenos/90047592374 )
몇 년 전부터 다니기 시작했지만 처음에 느꼈던 경이로운 맛의 충격은 이제 못 느끼고 대신 익숙한 여름 음식이 되었다. 실망은 하지 않을 곳이다.


함흥냉면이다. 이 집엔 물냉면(6천)과 비빔냉면 등이 있는데 난 이 맛이 좋아서 늘 물냉면만 먹는다. 여기에 겨차, 식초 다 넣는 사람들도 있던데 난 이 자체만으로도 새콤, 달콤, 진하디 진한 고기맛의 육수가 잘 조화되어 있어서 딱 좋다. 간도 맞고. 5~6년 전에는 고기 완자를 얹어 줬는데 스타일을 바꾼 듯.

6. 교동 양념 오뎅

고등학교 때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오뎅. 가끔씩 이 맛이 생각이 나길래 엄마랑 갔다. 그런데 영 그 맛이 아니었다. 4개 천원으로 가격은 많이 오르지 않았지만 조미료 맛이 강하게 났다. 아쉬웠다.



이 외에도 사실 가 봐야겠다고 점찍어둔 식당들이 많았지만 (변님의 복수를 위해 진흥반점도 갔어야했고!) 머무르는 동안 가장 많이 먹은 건... 자취생 좁은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아 못 먹는 '수박'과 엄마표 밑반찬들이었다. 그리고 건너 동네 소 잡는 날 예약해서 얻어 둔 초초 일등급 소고기를 즉석에서 구워 살짝 익었을 때 쪽쪽 육즙 빨아먹고 먹었던 것. 너무 지겨워서 소고기는 심지어 된장찌개에 막 넣어 먹는 사치를 부리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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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계단을 내려와서 직진을 하면 멀찌감치 계산성당이 보인다.
1919년 3월 8일 오수 2시경에 그 90계단 위 동산 언덕의 솔밭에서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계성학교(주요 근대 건축물이 세 채가 여전히 큰 규모로 남아있고, 또 사용되고 있다.),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과  남산교회, 서문교회 교인들이 큰 장(서문시장) 안 강씨네 소금집 앞으로 접근해서 모였고. 동산 솔밭에 시위대가 모여 이만집 목사가 소 달구지 위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며 약전 골목(약령시) 등으로 1천 여명이 걸었다고 한다.

계산성당은 사적 290호로 영남 최초의 고딕 양식 건축이고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 상을 지나 입구를 지나면 건물이 드러난다. 지금도 견고하게 서 있고, 안에는 기도를 드리는 분들이 모여서 미사 준비를 하고 계신 것 같았다.


건물 오른쪽을 따라 걷다보면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있고 그 곳에 '빼앗길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시인의 고택과 독립운동가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보존되어 있다. 난 너무 배가 고파서 담장 너머로 힐끔 보고는 약령시로 갔지만(..)


잠시 앉아 이것 저것 기도를 드렸다.


제일교회 왼쪽으로 내가 내려온 길이다.


독립운동의 자금을 대기도 했던 약전 골목. 일명 약령시.
약재상들이 죽 늘어서 있어서 거리 전체에 한약냄새가 난다. 여기에 화교 거리도 있고 더 나가면 떡전골목이라고 이바지 음식과 낙원상가처럼 떡집들이 늘어서 있고, 염매 시장이 있다. 대구의 오래된 시장이다.


시간이 8시가 다 되어갔던가 그래서 영업을 종료하고 조용한 거리. 약전골목 한 중간에서 찍어봤다.


화교거리를 알리는 건물.


제일교회
유형문화제 제 30호로 지금은 제일교회 교육관으로 쓰이고 있다.
대구 지역에서는 최초로 종탑을 올린 건물이라고 한다.
1933년에 모금과 성금으로 건립하고 2년 후에 종탑을 올렸단다.


역시 너무 늦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건물 오른편의 작은 골목을 들어가면 바로 약령시 박물관이 있다. 꽤 예쁘게 단장해 둔 곳이다.


건물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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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저것 보면서 걷다 보니 쉬고 싶어져서 간 연암.
10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고즈넉히, 생기있게 있어서 고마웠다.

<찾아가는 길>
전 화 : 053-425-7383 주 소 : 대구 중구 동인동1가 133
삼덕 소방서에서 찾아가거나 경북대병원 맞은 편으로 해서 가거나 편한 길로 가면 된다.
삼덕 소방서에서 연암 쪽으로 가는 길에는 빈티지 카페나 북카페 등이 구석구석 짱박혀있다.
지도에서 A라고 되있는 부분이 찻집.


이 길의 끝으로 가면 오른편에 대구백화점이 있고 그 백화점을 두고 남북으로 긴 대로가 동성로 거리이다.
향촌동 거리를 걷다가 이 쪽으로 약 25분 정도 걸어온 것 같다.
연암으로 가기 전에 뒤를 돌아서 찍었다.


사진을 찍고 한 블럭 더 남쪽으로 걸어가서 다시 옆 쪽을 본 도심 거리.
이제 삼덕 소방서에서 길을 건너 (사진의 오른쪽에 조금 보이는 곳이 삼덕 소방서)
연암으로 향하기 전에 찍어 본 거리. 역시 다 비슷해 보인다.


연암으로 가는 길.
이 길 끝 즈음 오른쪽에 연암이 있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소설'이라는 북카페가 있고 와인 바가 있고 또 포장마차 같은 빈티지 카페도 있다. 제각각 서로 다른 개성의 가게들이 숨어 있다.


연암으로 가는 길에 왼쪽을 보면 '관음사'라는 절이 보인다.
군산의 '동국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사찰을 그대로 쓰고 있는 보기 드문 일식 사찰이다.


입구 오른 쪽의 일식 석탑
안을 조금 구경하다가 개가 너무 짖어대는 통에 시끄러워서 나왔다.


연암이 보인다.


장미가 한창이고나


들어서면 보이는 집 한 채.


그 집 옆으로 본 건물로 들어서는 길이 나 있다.


첫 째 집 너머로 보이는 다른 칸들.


왼쪽으로 가면 입식 테이블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좌식 방들이 있다.


중간 방에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난 테이블에 앉았다. 10년 만에 찾아온 거라 정말 반가웠다.


테이블에 앉아 중간방을 보니 엎드려 뭘 쓰고 있는 학생이 있다.


털썩 앉아 바깥 정원을 보니 녹음이 눈이 부시다 부셔.




이 착한 가격 T-T...


메뉴판 표지


테이블 마다 양식들이나 세팅 색깔들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중국식 테이블


앉기 전에 보니 여름이 다가온다고 고운 모시를 깔아 놨더라. 나 이거 엄청 좋아하는데... 감격했다.
아아 양질의 서비스~


그림이 하나 걸려있는데 연암 정원을 그렸다.


뒷뜰 문으로 보이는 풍경.
저기 골목 끝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딱 돌면 어릴적 자랐던 우리 교회가 나온다.


화장실로 가는 뒷뜰 바닥 꾸밈.


왼편은 도예관


정원 안에서 입구를 바라봤다.


찻물 따듯하게 먹으라고 올려주신 주전자


안뜰에서 안을 보니 다정도 하셔라.


역시 안뜰에서 입구 쪽을 본 것.


바람 불 때 마다 나는 풍경소리가 한없이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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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동 추억의 거리’는 어떤 곳일까. <향촌동 소야곡-조향래 作>이란 책은 이렇게 적고 있다. “…1950년대 대구 향촌동은 한국 문단의 중심지였다. 전란의 여파와 가난의 질곡에도 낭만이 있었고, 피폐와 절망 속에서도 술이 익고 음악이 흘렀다. 피란시절 향촌동은 우리 문화ㆍ예술의 요람이었다.…”  향촌동 골목의 탄생은 이렇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나면서 대구 중구 향촌동, 북성로 일대에 시인 박두진, 구상, 작곡가 김동진, 화가 이중섭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이 피난살이를 위해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작가들은 향촌동 일대에서 문학과 예술의 르네상스를 이루며 청춘을 불살랐다고. 그 흔적들이 남겨져 있는 곳이 바로 향촌동이다.




최근 대구 중구청은 이 거리를 ‘추억’이라는 테마가 있는 거리로 조성키로 했다. 현재는 현황판과 현판, 그리고 더러 남아있는 건물을 통해 예술인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가 출판된 꽃자리 다방, 전쟁 당시 외신들이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타전했다는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김광섭,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구상, 등 종군 문인들의 합숙소나 다름없었다는 감나무집(술집) 등 술집과 다방의 흔적을 구슬 꿰듯 하나씩 찾아 보는 것도 의미깊은 여행이 될 성 싶다. 대구 중구의 중앙네거리에서 대구역 네거리 방향으로 가다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향촌동이 나온다. 지금은 당시의 간판도, 사람들도 사라졌지만, 향촌동 골목 구석구석에는 그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주변에 경상감영공원이 있다.

이 기사를 언젠가 보고서 메모를 해 둔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 대구길에 제일 먼저 가 보고 싶어서 첫 날 찾았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다)

중앙의 가장 윗쪽 노란색 동그라미가 향촌동과 그 일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고, 그 시절을 주름잡던 '녹향 음악감상실'은 길 맞은 편 '한국영상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옮겨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영상 박물관 녹향에서 좀 더 왼쪽에 교동시장이 있는데, 부산의 깡통시장처럼 대구에서는 '도깨비 시장'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전쟁통에 밀수한 일본 물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거래되던 곳인데 서울의 남대문 시장처럼 지금도 없는 게 없어 보인다. 동동 구리무라는 화장품, 콜드 크림으로 불리던 엄마들의 영양 크림, 코티로 유명한 화장품 분냄새가 물씬 나서 괜히 기분이 편안해 지더라.
그리고 사진에서 보이는 향촌동 왼쪽으로 경상감영공원이 있고, 더 왼쪽 끝에 한국산업은행이 있는데 이 건물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지역 문화제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이다.


대구 극장 맞은 편, 대구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자리한 '녹향 음악실'
대구의 종로, 부산의 남포동이라 할 수 있어서 신시가지와 달라 낡은 흔적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없어질 위기에 처하다가 대구 중구청의 도움으로 영상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근근히 이어가고 있다.
입장료는 2천원이고 커피와 물 등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커피 자판기)


이 놈의 수전증. :-p
실내 풍경이다.  마치 그 시절 50년대 문인들이나 한 풍류하는 양반들, 신여성들이 바흐를 듣고 베토벤을 듣던 다방 느낌이 물씬 난다.
가장 먼저 나를 깨우고 들뜨게 하는 것은 '향기'.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가 나는데 불쾌하거나 꿉꿉한 기운 하나 없이 세월의 향기가 난다. 그 냄새...


파석으로 장식된 벽이 옛날 부잣집 양옥같다.


저 입구를 통해 들어온다.
달력은 2009년인데 마치 1974년의 시간 같다.


감상에 좋으라고 커텐을 쳐 두고 스탠드를 켜 둔 모양새가 드라마 속 같았다.


구순이 다 되어가는 이 어르신 혼자서 꾸려가신다. 이 어르신이 자녀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고 계시다.
자부심과 어른의 자태가 인자하고 꼿꼿하셨다.


다방 의자에 앉아 베토벤을 들었다.


어르신이 나온 기사 '음악 짝사랑 한평생, 팔순의 푸르른 향기'




녹향을 나와 이제 교동을 조금 걸었다.
교동 시장 입구

시장표 옷들이 한 무더기.
나도 앉아서 골라서 2천원 주고 유한마담 블라우스를 하나 구입. 크크

구 번화가라 시장과 쇼핑몰 등을 살리느라 도로 정비, 벤치 늘리기 등 상가에서는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당시 피난시절 번화가를 이뤘던 캬바레같은 건물들이 운치가 있었는데 그런 곳을 오히려 특화하면 어떨까.


골목 골목 끝이 없는 도깨비 시장.
길을 잃을 뻔 했는데 어디로 가든 통하는 게 길이라고 다시 중앙도로로 나왔다.


이제 향촌동 거리 일대를 가기 위해 중앙 대로를 건넌다.
맞은 편의 약국 건물이 군산에서 자주 보던 스타일이다.

이제는 흔적이 없어진 향촌동 거리.  가죽과 제화 거리가 되었다.

향촌하와이 나이트클럽.  향촌의 이름은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동네가 그렇다보니 향촌 주차장에서도 이름을 발견.  역시 제화점이 가득했다.

향촌 주차장 옆의 건물은 적산가옥이다.

부산 남포동, 자갈치 시장이나 군산에서 볼 수 있는 벽과 지붕


제화점들이 있는 거리 안 쪽으로 들어가면 '향촌동 예술의 거리'를 남기고자 하는 몇 몇 기념패들을 볼 수 있다.

음악감상실 '르네상스'를 기념하는 문패.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

미용실이 되었다가 이제는 완전히 폐업해 버렸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성인 나이트 클럽이 되었다. 조그맣게 르네상스 기념패가 보인다.
여기는 성인들의 장소인지 저 조용해 보이는 골목마다 소주집들과 요란한 뽕짝이 흘러 나오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당췌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낮부터 얼굴이 불커진 중년남녀들이 손을 붙잡고 지나다녔다.

작은 간판들


아직 그 때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 곳도 곧 개발되겠지..


골목은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고... 계속 이렇게 골목들을 따라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나온 공원. 경상감영공원.  규모가 꽤 컸다.


사람들도 많았다. 인사동처럼 어르신들이 모여서 장기를 두고 훈수를 두고 소일거리를 하셨다.



이렇게 공원 외곽을 따라 걸어서 다음 코스로 향했다.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 중 하나이다. 1918년 10월에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개를 합병해 설립되었으며 일본 제국의 식민지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중요한 축이 되었다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에서 자금 공급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중일 전쟁 이후로는 약 8년 동안의 전시 체제 속에서 채권 발행과 강제 저축을 통해 조선의 자금을 흡수하여 일본 정부와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산업 부문에 이를 공금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한국식산은행으로 개칭되었고, 한국식산은행은 1952년에 한국산업은행에 합병되었다." 고 한다.





" 2층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남측 도로인 서문로에 면하여 남향 배치되어 있다.남측과 서측의 출입구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 외관은 크게 상부와 하부의 재질을 다르게 함으로써 구성상의 다양성을 추구하였다.하부벽은 화강석 다듬돌을 쌓아 구성하였고 상부벽은 흰색 타일 붙임을 하여 구성하였다.도로에 면하는 남쪽과 서쪽의 창 사이의 벽은 돌출시켜 기둥처럼 만들고 건물 양 모서리와 각 기둥의 주두를 몰딩으로 장식하였다.기둥 위에는 나뭇잎 모양을 양각한 사각형의 부조 장식판을 붙였다.전체적으로 단순하게 처리한 정면부의 장식과 수평선을 강조한 지붕 슬라브의 처리 등을 통해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건물로 주위의 다른 건물과는 재료처리나 형식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내부 칸막이벽 마감재 등이 다소 바뀌긴 했으나 건물 전체의 형태는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1931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된 2층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남측 도로인 서문로에 면하여 남향 배치되어 있다.

  남측과 서측의 출입구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 외관은 크게 상부와 하부의 재질을 다르게 함으로써 구성상의 다양성을 추구하였다. 하부벽은 화강석 다듬돌을 쌓아 구성하였고 상부벽은 흰색 타일 붙임을 하여 구성하였다. 도로에 면하는 남쪽과 서쪽의 창 사이의 벽은 돌출시켜 기둥처럼 만들고 건물 양 모서리와 각 기둥의 주두를 몰딩으로 장식하였다. 기둥 위에는 나뭇잎 모양을 양각한 사각형의 부조 장식판을 붙였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게 처리한 정면부의 장식과 수평선을 강조한 지붕 슬라브의 처리 등을 통해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건물로 주위의 다른 건물과는 재료처리나 형식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내부 칸막이벽 마감재 등이 다소 바뀌긴 했으나 건물 전체의 형태는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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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안내 지도.
오른쪽 위로 성유스티노 신학교(대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가 보이고
교구청 정문 바로 앞이 대구 성바오로 수녀원이다.
수녀원은 평일 낮에 가면 안내를 받아 안쪽 건물까지 관람할 수 있는데 나는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에나 가서 정문 앞의 건물만 보았다. 그리고 유스티노 신학교는 금녀의 집이라 ('신부수업'을 찍을 당시 하지원은 들어갈 수 있었다) 구경만 하다가 왔다. 다음 번엔 혹시 공개되는 날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대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남산성당'으로 가자고 하면 (혹은 성모당으로 가자고 하면 다 안다) 10분 내외로 도착한다. 나는 정문으로 들어가서 성모당과 성직자묘역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후문으로 나와서 다시 택시를 타고 시내로 갔다.

 

성바오로 수녀원의 입구.
이 수녀원 안쪽으로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들이 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물도 정말 아름답다.


택시를 타고 올라왔던 길. 오른쪽이 대교구청. 왼쪽이 수녀원.
멀리 보이는 높은 건물이 있는 곳이 대구 시내다.


수녀원 입구의 정원을 보는 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사진을 찍고 있으니까 입구 안내실에서 수녀님이 오시더니 "아름답습니까"라고 물으셔서 "네"라고 대답했다.


맞은 편의 대교구청 입구.
여름 냄새가 물씬 난다. 조용하고 환한 곳.
곳곳 벤치에서는 김밥을 싸와 아이들과 나들이를 온 가족도 있고, 책을 읽는 분들도 많았다.
입구를 지나 바로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성모당이 나오는데 이 앞에서는 침묵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가득했는데 평화롭고 온유한 곳이었다.


입구를 지나 오르는 길


예수님의 이야기가 곳곳에 형상화되어 있다.


조금 오르다가 뒤를 돌아봤더니 그 모습도 좋았다.


인쇄소로 쓰이는 건물


모든 건물들이 붉은색 벽돌.


성직자묘역 앞


멀리 성직자묘역이 보인다.


입구


양쪽 문의 왼쪽에 있던 글자
무슨 뜻일까... 라틴어인가


오른쪽 글자


멀리 도시풍경이 보이고, 도시 안에 이런 고즈넉한 곳이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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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구 여행을 한 곳.

1번: 대구 교동 시장과 60년대 한국 문학의 요람이었던 향촌동, 그리고 경상감영공원
2번: 대구 시내, 쇼핑과 식당들 동성로 거리
3번: 계명대학교 병원인 동산 의료원 안의 의료 박물관 건물 세 채(근대 건축)와 
      선교사님들의 묘가 있는 은혜정원, 
      그리고 그 뒤 제일교회로 이어지는 3.1운동이 시작된 거리
      동산 의료원 맞은 편은 서문시장.
4번: 담장허물기 운동이 시작된 대구 삼덕동의 카페와 담장이 없는 삼덕동 거리
5번: 김수환 추기경의 자취가 담긴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 캠퍼스(근대건축)와
      대구 성바오로 수녀관(근대건축), 그리고 대구 대교구청(건축, 선교사님들의 묘).
      그리고 근대건축이 잘 보전된 계성학교.
6번: 근대건축물들로 캠퍼스가 이루어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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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온 남동생과 동네에서 만나 밥을 먹고,
함께 대구로 가기로 했다.
점심부터 장작구이 삼겹살을 먹었더니 든든했다.
(영동시장 맞은 편 CK 매장 골목의 '장쌈', 장작구이 쌈밥이라는 곳인데 밑찬도 맛있고
삼겹살도 기름기가 없어 먹을 만하다.)


내가 짐을 꾸리는 동안 커피를 한 잔 하겠다며 탐앤탐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동생.


아침의 비보


덩그러니


오후 5시 쯤 기차를 탔는데 배가 출출해져왔다.
재미삼아 KTX 도시락을 7천원 주고 샀다. 적당한 가격의 나쁘지 않은 한끼.


대구 동네에 도착~


경비실 앞의 글자도 정겹고


동네 자전거포도 그대로여서 반가웠다.


밤엔 동화사 분향소를 들렀다.
밤의 절은 참 조용하고 향냄새가 은근히 사람을 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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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대구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꾸준히 들었었다.
그래서 대구를 여행하기로 마음을 먹고 자료를 찾고 이것 저것 모았다.
첫 째날은 슬슬 쉬면서 일단 먹고 (..)
둘 째날은 50년대 대한민국 문인들의 거리 향촌동과 인근의 번화가였던 교동을 다녔고,
세 째날은 대구의 3.1운동이 시작된 곳과 주변의 선교사 사택 및 선교사 묘와 몇몇 근대 건축물들(1900년대 당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만큼 기독 각성과 운동이 벌어졌던 곳이어서 대개의 근대 건축들이 개신교 교회나 가톨릭 교회, 가톨릭 대교구, 신학교, 개신교 학당들이었다.)
모두 근대 문화재로 아주 귀한 건물들이었다.  건축물의 규모, 양식 등의 가치와 보존 상태를 보면 군산 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약령시장이 서는 약령골목과 떡골목, 진골목, 3개 시장이었던 서문시장 등등 매일 강행군이다. 대구는 둥그런 타원형으로 생겨서 그런지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고 집중력있게 발달되었다. 도심의 번화가인 동성로는 명동, 종로, 삼청동, 강남역을 한 곳에 모았는데 각각은 골목을 중심으로 적당한 경계를 형성하면서 발달되었다. 삼청동에서 브런치를 가진 후, zara매장에서 쇼핑을 하는 식의 생활 양식을 걸어서 15분이면 가질 수 있는 셈이다. 공평동 골목에서 브런치와 혹은 멕시칸 음식, 홍대 풍의 카페에서 후식을 하고 15분 정도 걸어서 zara나 유니클로의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다시 10분 쯤 걸으면 원하는 다음 코스로 이동이 가능하다. 네일샵 골목이라든지 애견샵 골목, 혼수 떡 골목, 약재 도매상으로 조선 최대였던 약령시장 골목까지... 
재미나서  6~7시간씩 걷곤 했더니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그런데도 어서 아침이 되어서 내일 가려고 했던 곳을 빨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도는 필수!
따로 한글 파일로 나만의 지도를 만들었는데 유용하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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