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니씽 엘스

우디 알렌 단독일 때 보다 오히려 제이슨 빅스와 함께 나오니 굉장히 편하게 느껴진다. 난 일단 우디 알렌이 등장하고는 그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곧 울 듯한 표정으로- 말을 해대기 시작하면 긴장한다. 게다가 그 말들 사이에서 행여나 뭔가 영화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말들이나 태도가 숨겨져 있을까봐 조바심내 했다. '애니홀'을 제외하곤 우디 알렌의 영화들을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보긴 봤으니 유쾌했던 경우가 없다. 졸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사실 '매치 포인트'도 중간에 결국 포기하고 자 버렸다. 끝 부분 즈음 굉장한 흡인력으로 한 순간에 관객을 휘감아 정서적 감동과 울림을 준다는 이야기들만 몇 번 들었지만, 다시 보고 싶진 않다.
이제 내게 영화는 내가 좋아해서 보는 것이지 대화 할 때 후달리지 않기 위해서거나, 촌스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내 무지를 감추려는 용도로서의 영화 보기는 폐기되었다. 하루에 몇 편씩 비디오를 보고 극장에서도 거의 매일 영화를 보던 시절에, 영화는 그냥 내 생활의 배경이었다. 그 때 나는 '진저스넵'처럼 우연히 집어 들었다가 몇 번이고 다시 보며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얼마든지 영화가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하고 스스로의 장르틀에 매여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의무감으로 본 우디 알렌의 영화들을 보았을 때의 기억때문에, 그의 영화는 선뜻 고르지 않게 되는데, 그래도 '애니홀'을 봤을 때 처럼 청량감을 놓치게 될까해서 집어 들게 된다.
제이슨 빅스와 우디 알렌의 콤비는 무척이나 속이 시원했고, 즐거웠다. 영화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총'과 관련한 어떤 해프닝이 우왕좌왕하면서 발생했으면 더 좋았을 법 했는데 아쉬웠고, 크리스티나 리치의 엄마로 등장하는  '스톡카드 채닝'(웨스트윙에 나오는 우리의 영부인!)이 더 그의 굵직한 목소리와 카리스마로 극을 전두지휘하는 부분이 있었으면 했다. 그녀의 '피아노'와 우디알렌의 '총'이 한 집에 들어오면서 긴장과 스트레스, 강박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데다가, 개념없고 자기 중심적인 고양이같은 크리스티나 리치의 무관심이 도화선이 되어서 우유부단한 제이슨 빅스가 코너로 몰리게 되고, 그것을 나레이팅하는 관조적인 입장으로서의 우디 알렌을 기대했는데 아쉽게 되었다.
하지만 제이슨 빅스가 작가를 연기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크리스티나 리치는 음 이제 비호감.

2. 마이애미 바이스

난 이제 마이클 만의 빠순이가 되었다.
내가 세계를 보는 이미지와 가장 흡사한 것이 마이클 만이다. 콜래트럴이나 마이애미 바이스.
나는 자의식이 강하고, 이질적인 내 세계가 완고해서 정서적으로 받는 감정들이 금새 포화상태가 된다. 언제나 내 자의식과 감정을 버리고 있지만, 버리는 속도와 차는 속도가 달라서 문제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을 많이-그리고-자주 못 만나는 것이다. 버리는 속도를 빨리해서 능률을 올리면 되겠지만 힘들다. 이 부분에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기 시작하면 아마 난 모든 학업(혹은 직업)을 관둬야 할지도 모른다. 교회 생활과 학업(혹은 직업)을 병행하는 것과, 내 속도대로 나를 비워서, 그 빈 곳을 마음과 감정들로 채우는 일들이 느리게나마 진행되고 있다.
직업이 없으면 물론 인간관계가 좋아질 것이다. 난 사람들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일단은 해야할 일이 있고 이 일도 내가 좋아하는 거고 뭐 블라 블라 블라
암튼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부분을 생각을 하지 않고 사진같이 이미지로 기억을 한다.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포화상태가 금방 되기 때문에 나만의 관리 방식인 셈인데, 그래서 날씨와 햇볕에 많이 의존한다. 햇볕이 좋은 날씨면 그 날은 세상이 평화로운 날이고 뭐 그런 식이다. 색에도 민감한 편인데, 이건 서울시의 공기오염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강남역은 모든 게 엉망인 곳이되고, 인왕산 주변은 상대적으로 공기가 좋아 모든 게 조화로운 장소가 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선.
무튼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몇 몇 풍경들이 있는데, 마이클 만은 그걸 잘 알더라는 것이다.
디지털로 화면을 잡았을 때 감정이 흘러 넘치는 이미지가 있고, 35미리 필름으로 찍었을 때 고전적인 이미지가 잡히는 장면이 있는데 그 차이를 잘 알더란 것. 카메라 감독의 눈과 감성은 35미리 필름인데 디지털로 바꿔만 놓으면 영화가 전체적으로 김샌 사이다같고 물먹은 스폰지같고, 45평 아파트에 채워넣은 가구는 엉성한 그런 빈약함이 든다.
그런데 '콜래트럴'때 확실히 느꼈지만 그는 정말 '도시'를 잘 알고, 도시와의 사랑-외로움을 함께 껴안고 사는 감성을 안다. 굉장히 동양적인 부분도 많다. 사소한 스침의 느낌이나 눈빛의 밀도 같은 부분을 표현할 때는 마이애미나 LA가 주는 화양연화같다.
'콜래트럴'보다 훨씬 좋다고 느낀 것은 리듬감. 소리로 리듬을 북돋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미지로 리듬을 만들어 낸다. 색으로 음의 영역인 리듬을 보여준다.


3. 캐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

2편인 '망자의 함'을 피치못할 사정으로 보러 들어가서 그만 내가 꿈꾸던 조니 뎁을 찾고 말았다. 나는 늘 조니 뎁이 엉뚱하고 냉소적이긴 하지만, 생기가 있고 통통 튀어 오를려는 에너지가 있는 모습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창백했다. (가위손) 아니면 느끼하거나. (초콜렛) 이도 저도 아니라면 주연급 배우답게 그냥 영웅적인 해결사 모습들. (심지어 '프롬 헬'에서조차) 브루스 윌리스나 제임스 본드식의 자기 캐릭터가 분명한 영웅도 아니고 그냥 잡지 화보나 유별난 사생활을 가진 자기의 모습 그대로이지 배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에드우드'는 좋았지만 뭔가 더 명랑하기를 바랬다. 괴상한 조증같은 게 아닌. 기름과 물처럼 늘 분리된 듯한 피곤함을 유발시키는 캐릭터들이 많았다.
그리고 올란도 블룸은 내가 싫어하는 얼굴형이어서, 키이라 나이틀리는 뭐랄까 너무 판에 박힌 느낌이 있어서 난 정말 이 영화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망자의 함'을 보고 나서 난 뻔뻔 능청맞은 미워할 수 없는 시누이같은 모습의 캡틴 잭 스패로우에 엄청 즐거워졌고, 즐거웠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너무 좋아한다. '옛날 어디에 말이지...'로 시작하는 정말 '이야기'.

4.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초반에 보는데 약간 짜증이 났다. 안드리아가 징징대서.
그런데 보다 보니 딱 내 얘기더라. 미란다와도 같은, 자기 일 잘 하고 잘 해 내고 똑 부러지는 교수님들. 소설을 읽었지만 영화가 소설 보다 나았다. 특히 파랑색 스웨터와 블루 컬러와의 은유 부분에서는 오히려 소설에서 의미없이 지나간 부분을 잘 퍼올린 경우였다. what you do can tell who you are. so... do my best. 쩝
친구로 나온 릴리는 '렌트'에 나왔던 배우여서 되게 반가웠다. 메릴 스트립, 아 정말이지 배우라는 직업을 고귀하게 보게하는 배우다.

5. 디파티드

일단 맷 데이먼을 좋아하기 때문에 오랫만에 스크린으로 볼 수 있어서 기다렸다.
롯데 시네마라는 다소 특이한 곳을 갔는데 옛날 극장 기분이 나서 마음이 편안했다. 롯데월드 안에 있는데 극장으로서의 편의 시설도 후지도 1관과 다른 관 사이의 거리가 5분 이상 되고, 미로같은 곳에서 찾아 헤매야 한다.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보았다.
극장에 가면 오른쪽 어깨 부터 목으로 올라와서 뒷골까지... 귀 옆 오른쪽 머리가 찌릿찌릿하게 전기가 통하듯이 아프곤 했는데 난 그게 우발적인 건지 알았다. 그런데 평소 아무렇지도 않다가 한 달여 만에 '후회하지 않아'를 보러 극장에 갔을 때 또 아팠고, (부산영화제에서도 영화관에 들어가면 아팠다.) 와 또 몇 주 후 '디파티드'를 보러 갔을 때도 그런 거다. 작년에는 간혹 그러긴 했지만 극장과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안했는데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KTX도 그렇다. 갇힌 공간이 스트레스가 되고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는 것 같다.
어쨋거나 머리가 아파서 혼미한 상태로 보아서 더 무덤덤하게 봤는지도 모르겠다. 디카프리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하면서, 굉장히 '아이돌'로서나 '스타'로서의 모습에 연연하지 않는 듯 해서 괜찮았다. '타이타닉' 이후 엉거주춤하더니 결국 자기 갈 길을 잘 간다. 맷 데이먼도 그래서 부러워하는 인생을 가진 사람이다.

6. 책 두 권

'사립학교 아이들', '공중그네-인더풀'
머리가 복잡해서 그냥 재밌게 읽고 싶어서 샀다. 난 언제나 '이야기'- 문학이 주는 그 거대한 상상력과 호기심의 바다로 가서 실컷 놀다와야되는 사람이어서 이야기책을 사려고 서성거렸다. 어떤 때는 남미쪽 책들, 어떤 때는 미국쪽 책들, 어떤 때는 유럽의 고전들, 그리고 간혹 우리 소설이나 일본 소설들을 본다. 사립학교 아이들은 미국 책인데, 십대의 자전적 기숙학교 생활 이야기라 소녀들의 감정이나 관계에 대한 몰두가 재밌을 것 같아서 샀다. 읽을 만 한 책이었고 실제로 디테일도 좋다. 하지만 한 1/3쯤 지나니 너무 구태의연하고 지루해져서 거의 속독으로 읽었다. 일단 나레이터인 주인공이 심하게 재미없었다.
그리고 일본 소설인 '공중그네'와 '인더풀'. 인더풀은 공중그네의 2탄격인 모양이다. 거짓말 안하고 2시간 반 정도면 두 권 다 읽는다. 얇다. 그리고 그냥 재밌다. 만화같다. 에피소드별로 있어서 굳이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일본 만화를 제외한 모든 장르의 지루함과 지겨움, 순진함이 전부 노출되 있어서 역시나 읽고 나면 되게 짜증나고 찝찝해진다. 이런 토양에서 어째서 '기타노 다케시'나 '감각의 제국', '마루야마 겐지' 같은 걸출한 이들과 작품들이 태어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세상에 '공각 기동대'를 만들어낸 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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