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부터 꼬박 두 달간 이사 문제로 시달렸다.

어찌나 시달렸던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추리 소설을 꺼냈다. 


나는 추리소설이라면 쟁이고 보는 사람이라 읽을 거리는 많았다. 
글자가 안 읽히는터라 가장 얇은 책인 <점과 선>을 꺼내 읽었다. 

<점과 선>
<점과 선>은 1950년대 일본 추리 소설이다. 고전적인 데다가 '기차'가 나온다!
고전적인 소설이라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고, 
정평난 소설답게 문장도 유려하고,
결정적으로 짧기까지 했으니
술술 잘 읽혀야 했으나,
내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일본인 주인공의 이름들을 써가면서 읽어야 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추리 소설을 집었는데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참에 우리나라 추리 소설을 읽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요며칠 읽은 우리나라 추리 소설을 정리하였다.


우리나라 추리소설로는 도진기 작가의 <유다의 별>, 유현산 작가의 <살인자의 편지>, 박연선 작가의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가 기억에 남는다. 

사실 이 외에는 읽을 적이 없는 것 같다. 셋 다 재밌게 읽은 데다 우리나라 장르소설이 일본 소설보다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개인적으로 일본 추리소설은 통 적응이 안 되어서 우리나라 소설이 더 재밌었다.
또, 이사 때문에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사회 문제 같은 걸 기저에 깐 소설이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이야기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책소개를 읽는 것만으로도 푹푹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뭐랄까... 일상에서 탐정이 활약하는 그런 소설만 골랐다.


"세이지는 이날, 통상적인 동물원 앞 파출소 근무가 아니라 오카치마치 주변 순찰에 동원되었다. 파트너는 평소처럼 요코야마 고키치였다."와 같은 문장이 이어지는 이야기보다는 아무래도 
"이튿날 당승표와 나승만은 인천행 전철에 올라탔다. 2시간 동안 1호선과 인천지하철로 두 번 갈아타고 내려 오자 후끈한 여름 공기가 둘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백 번 천 번 더 편안하다. 


<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 (최혁곤, 이용균)
야구 전문 기자가 쓴 야구 추리소설이다. 
야구단 프론트인 주인공이 야구와 관련된 몇 개의 생활 사건을 추리하며 해결하는 소설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비밀도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야구팬이라 이 소설은 너무나 너무나 즐겁고 소중하다.  


<침입자들> (정혁용)
택배 기사인 주인공의 생활 반경에서 생기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모은 글이다. 언제쯤 사건이 발생하고 추리를 하나... 하다보니 소설이 끝나버렸다. 
엄밀히 말하면 추리소설이 아니어서 배신감이 느껴졌다.
다만, 글이 재밌다. 그리고 문장이 재밌어서 시간 가는지 모르게 단숨에 읽었다.


<이선동 클린센터> (권정희)
이번엔 택배 기사는 아니고 특수 청소를 하는 청소업체 사장 이선동 이야기다. 이선동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어쩌다 청소업체 사장이 된다. 직원은 달랑 2명. 사건이 발생한 집을 청소하는 특수업체다 보니 이런 저런 사건을 추리해 나가게 된다. 이 역시 재밌게 읽긴 했지만 뭐랄까... 좋은 사람들이 죽어서 싫다. 스트레스 받았다.  (왜죽여!!)


<봉명아파트 꽃미남 수사일지> (정해연)
이번 소설의 탐정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꽃미남이다. 얼마나 꽃미남인지 알 길은 없지만... 다른 소설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분량이고, 사건의 모든 공간과 사람이 익숙하니까 재밌었다.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평면적이라 다소 아쉽지만 추리소설의 묘미는 트릭과 그것을 간파하는 탐정이므로! 나도 같이 추리해 가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교동회관 밀실 살인사건> (윤자영)
생활 탐정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을 찾다가, 이 소설 평점도 높고 리뷰도 많길래 읽어봤다. 일본 추리소설 카페 같은 데서 엄청나게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 작가는 실제 생물 선생님인데 추리소설도 쓰신다. 아무튼, 교동회관은 이북(ebook)이 없어서 사서 읽었는데, 그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우왓 진짜 재밌음.


<나당탐정사무소 사건일지> (윤자영)
전편인 교동회관 밀실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이 탐정사무소를 차렸다. 이후 이어지는 여러 개의 사건들이다. 역시 재밌었다. 학원 폭력 이야기는 너무 가슴아프다.  그래도 나쁜 놈이 죽고 착한 사람들은 안 죽어서 좋다. 


<붉은 집 살인사건> (도진기)
교동회관을 읽고 나니 추리소설 읽는 것에 다소 좀 진지해졌다.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와서 응급처치 대용으로 추리소설을 집은 것인데, 이제 글자도 다시 좀 보이고 머리도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추리소설가 중 한 분인 도진기 작가의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유다의 별>은 좀 황당했다. 추리소설에서 문장력이라거나 캐릭터의 촘촘한 울림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좀 아쉬웠다. 이 때문에 도진기 작가의 책은 선택하지 않았었는데, 읽을 거리도 점점 떨어져가서 그냥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재밌었다. 
와... 
암튼... 좋았다! 


<순서의 문제> (도진기)
붉을 집 살인사건과 유다의 별에는 '고진'이라는 탐정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떤 리뷰에 "진구 캐릭터가 젤 좋다"는 게 있었다. 그래서 검색을 좀 해보니, 도진기 작가의 작품은 '고진 시리즈', '진구 시리즈'로 구분되더라. 
그래서 진구가 처음 등장하는 <순서의 문제>를 읽었다.
우왓!!!!!!!!!!! 왔!!!!!!!!!!!!!!!!!!!!!!!!!!!!!!
재밌었다! 


<가족의 탄생> (도진기)
진구의 활약을 더 읽고 싶어서 잠오는 눈을 연신 비벼가며 읽었다. (하루가 너무 짧아..) 긴 소설을 이렇게 간결하게 후루룩 읽히게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영화나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면 좋겠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도진기)
코로나 때문에 2020년에 옷도 화장품도 안 사는데 리디북스 결제를 왕창하고 있다. 이사하고 잔금치를려면 한 푼이라도 아껴써야는데 절제가 되지 않았다. ㅠㅠ 
암튼 이 소설은 뭐랄까.. 읽는 내내 '여주인공 모임? 꽃보다 남자야 모야.. 좀 유치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와....... 왜 나 마지막에 울고 있음?? 
왜 눈물이 나고 난리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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