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테나 라디오 작업 때문에 라디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다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발견했다. 라디오라는 기계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1930년대 즈음의 이야기다. 영화감독 오손 웰즈는 H. G. 웰즈의 소설 세계 전쟁을 드라마로 각색해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화성인이 몰려와 지구를 공격하는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라디오 속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대국민 방송이 들려왔고 그 방송을 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은 실제로 화성인이 지구를 침략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실제로 몽둥이를 들고 화성인을 죽이기 위해 길거리로 나선 사람은 없었는지, 화성인에게 살해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자살한 사람은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쉽게도 전혀 없었다. 자료는 늘 그런 식으로 중요한 부분에만 밑줄을 그어둔다.

그 드라마가 라디오가 아닌 텔레비전으로 방송되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화성인 분장을 한 누군가 -1930년대였으니 분장이라고 해봤자 뻔하지 않았겠는가- 가 텔레비전에 등장했다면 아마 모두 키득거리며 재미있게 쇼를 지켜봤을 것이다. 어떤 디자이너의 말처럼 라디오란 현세의 규칙 너머에 존재하는물체인 것이다. 규칙을 무시할 수 있고 시간을 넘나들 수 있고 공간을 건너뛸 수 있는 것이 바로 라디오다. 메이비는 라디오를 믿었고, 좋아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어느 누구보다도 라디오를 좋아했다. 그는 텔레비전은 거의 보지 않는다고 했다.

한번은 메이비와 함께 야구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메이비 역시 야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제일 재미있게 본 야구 경기를 입으로 중계방송했다. 압축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과제라는 신념으로 살고 있는 나는 2분 만에 한 경기를 끝냈지만 메이비는 달랐다. 그는 몇 년 전 야구장에서 본 프로야구 경기를 20분 넘게 설명했다. 야구장에서 불어오던 바람의 느낌, 긴장한 선수들의 몸동작, 파란 하늘 속으로 날아가는 하얀 야구공에 대한 설명을 정말 실감나게 묘사했다. 20분이 금방 지나가버렸다. 묘사도 묘사지만 무엇보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멋졌다.

, 월드시리즈는 봤지? 우와, 정말 멋진 게임이었어.”

맞아, 정말 멋졌지.”

설마, 그건 텔레비전으로 봤겠지?”

아냐. 우리 집엔 텔레비전도 없는걸.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었지.”

, 아깝다. 그 장면은 텔레비전으로 봤어야지.”

라디오가 좋은 점도 있어. 물론 중계방송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재미가 없어지기도 하지만 말야. 소리만 들어도 제법 실감이 난다고.”

좋아. 그럼 마지막 경기에서 보스톤 레드삭스가 결승점을 올린 순간을 한번 설명해 봐.”

, 조니 데이몬이라는 왼손 타자였지. 그땐 중요한 경기여서 라디오 두 대를 동시에 켜놓고 있었어. 한쪽은 미국 현지 방송이었고 한쪽은 한국 방송이었지. 9회 말이었고 2 2 상황에다 주자는 2루에 한 명, 3루에 한 명 있었지. 첫 번째 스트라이크는 그냥 흘려보냈어. 투수의 제구력이 좋지 않았으니까 일단 기다려본 거겠지. 그때 심판 목소리 들어봤어? 그날따라 심판의 목소리가 굉장히 컸는데 9회 말의 그 목소리는 정말 쩌렁쩌렁했지. 뭐랄까, ‘이제 슬슬 끝낼 때가 됐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쏟아 부었던 거지. 공을 잡는 포수가 그 목소리에 깜짝깜짝 놀라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고. 두 번째는 바깥쪽 구석으로 떨어지는 싱커였어. 타자를 너무 얕본 거야. 그 정도 엉터리 유인구에 속을 타자는 아니었으니까 말야. 세 번째 역시 바깥쪽으로 빠지는 커브였는데 그때부터 야구장이 시끄러워졌어. 관중들이 모두 일어서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 원 스트라이크, 투 볼이었으니까 말야. 뭔가 일이 벌어지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지. 그때 투수는 꽤 고민을 했던 모양이야.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어. 다른 일은 전혀 생기지 않았어. 중계방송을 하던 아나운서도 조용했고, 미국 방송 역시 관중들의 함성소리만 흘러나왔으니까. 투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몇 초 후에 딱, 하는 소리가 들렸어. 아주 경쾌한 소리여서 듣기만 해도 안타라는 걸 알 수 있었지. 정확하게 끌어당겨 친 우중간의 2루타쯤이 아닐까 싶었어. 그거 알아? 외야수들은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만 듣고도 공이 떨어질 위치를 알아낸다고. 3루 주자는 여유 있게 홈으로 들어왔겠지. 아마 걸어 들어왔을지도 몰라.”

메이비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그 경기를 보는 동안 무엇인가 놓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텔레비전으로 본 것은 어쩌면, 메이비가 라디오로 들은 소리들을 뒤늦게 영상으로 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메이비가 설명한 경기의 그 순간들이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그때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게요아가씨에게 야구 룰을 설명해 주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보스톤레드삭스가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3루에 있던 주자는 분명 걸어서 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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