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기간이 아닌 부산은 처음이다.
나에게 부산은 뭐랄까, 가장 나였던 때를 보낸 곳이다.
그래서 늘 그립고 좋은 곳이다.
눈을 틔워준 분들을 만나던 곳이고,
어릴 때 그 분들 곁에서 깜빡 깜빡씩 졸면서 이야기를 듣고
들을 때 마다 감탄하던 곳이다.
아마 다시는 그런 사람들과 그런 시간을 보내지 못할 것이다.
원숙하고 다정했고 위트있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영업을 종료한 원목바닥의 술집에서 테이블을 붙여 놓고 벌어지던 새 밤의 시간.
이야기들, 단정한 목소리들, 뒤죽박죽 섞인 웃음 소리들, 차갑지 않던 배려들,
진부하지 않은 주장들, 위트들이 날아다니는 담배 냄새와 핀잔들.
자리를 옮기면 놀라운 장소에서 놀라운 음식들을 내주던 골목 식당들의 대가들.
(대가라고 밖에 표현이 안되는 묵직하고 간단한 한 접시들.)
시간이 흘렀다,
로는 표현이 안되는...
이젠 세월이 흘렀다.
나는 30대가 되었고, 그 시절이 다시 오지 않는 걸 잘 아는 나이가 되었다.
정말 그리웠었다.
너무 그립고 잡고 싶어서 daum 지도를 보면서 울 뻔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갔다.
살살살살 걸으면서 그 때 포장마차가 있던 자리,
그 때 새벽에 주워듣던 이야기가 새 나오던 술집들,
그 이야기를 듣던 그 식당 자리를 가 보고 싶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전화 통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그러지는 못하고 왔다.
아쉬움만 남는 여행이었다.
해운대
평일이라 한산하다
해운대 바다에 앉아 책도 읽고 한참을 있고 싶다는 상상을 많이 했었다.
내년 가을엔 영화제 때 꼭 와야겠다.
늘 부산에 있을 때는 언니들이 있어서인지
파블로프의 개처럼 해운대를 가니 곳곳에서 언니들과 뭐 했던 생각만 나더라.
백반집 앞에서 괜히 안을 바라보고
(저기서 김수로 봤었는데.. 이러고;;)
달맞이 고개를 보면서
(저기서 조개구이 먹으면서 아줌마들 불친절한 걸 농담삼아 막 웃었는데 이러고;;)
뿐 아니라,
한양족발 앞을 지날 땐
'개금밀면 먹고 2차로 저녁을 또 먹으러 와선 배 불러서 서로 한숨만 쉬고 그랬지' 이런 상념에 젖었다.
해운대는 많이 바껴 있었다.
3년 전에 해운대 앞에 거대한 신식건물을 들어섰길래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는데,
그 건물이 이번 여행의 숙소가 되었었고
그 옆으로 마치 제 2의 센텀시티가 되려는 냥 높은 건물들이 주루룩 섰더라.
그래도 이번엔 그 덕을 많이 봤는데,
해운대 앞의 '엔젤리너스'(?) 커피숍이 바로 그 곳!
2층 테라스에 앉으면 바다가 보이고 햇살도 들어오고, 게다가 커피숍도 널직하고 직원들은 모두 친절했다.
신분증을 맡기면 책을 빌려줘서
김연수의 신간을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두어 시간 정말 편하게 쉬었다.
더 바랄 게 없는 곳이었다. 4천원이 좀 안되는 돈으로 해운대를 가장 많이 누렸던 것 같다.
(참고로 김연수의 새 책, '세상의 끝 여자친구'는 그럭저럭 평이했다.)
아침은 호텔 조식으로 해결하고 슬렁슬렁 걷다가
해운대구청 옆의 고은 사진 미술관은 월요일에 쉰다고 해서 못 가보고
그냥 걷다가 밀면이나 먹자 싶어서 '밀면전문점'에서 먹었다.
이번엔 교대역 앞 국제밀면을 먹으려고 했는데
뭐 먹자고 이동하고 할 상황이 안되어서 가까운 곳에서 해결.
밀면을 그냥 흡입해 버렸다.
여긴 비빔면이 좀 더 맛있는데 맛이 점점 매워지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떠나던 날 미열이 있어서 아스피린을 먹고 출발했는데
여행 마지막 날 몸이 제일 안좋아져서
복국이며 아저씨 동태탕?이며 뭐며 하나도 입에 거슬려서 넘어가지가 않았다.
부산에 와서 식욕부진이라는 중병에 걸리다니 억울했다.
아, 그리고 붉은 수염도 3년 전 그 모습 그대로여서 으 반갑고 고마웠다.
잘 먹던 모듬 꼬치가 메뉴에 없어서 우럭구이를 먹었는데 아사히 생맥주도 맛있고
가격이며 가게 분위기도 참 좋았다.
3년 전에 무심코 '습관대로' 미나미를 갔다가 처절하게 망가진 모습에 충격을 먹고
들른 곳이 붉은 수염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고마웠다.
2006년의 미나미는 2001, 2002년의 미나미가 아닌,
하여간 정체불명의 미친 가게가 되어 있어서 그 때 술이 정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오뎅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었다.
그렇다고 일하는 아재를 붙잡고 "왜 그렇게 됐으요" 할 수도 없고.
암튼 붉은 수염은 잘 있었다.
붉은 수염은 잘 있었다.
그리운 것들, 사랑하는 것들이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할 때 마다
그래도 아직 세상은 날 버리지 않았다는 위로를 받는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옷 꽁꽁 싸매고 울고 싶을 때는 해운대 바다에 앉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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