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도는 따듯한 단편 소설을 읽었다.
소설가 김성중 기억해야지.
바톤 같은 사람들이라면 이 소설 읽고 다들 뭉클할 듯하다.
기대 없이 읽다가 빠져든 대목을 옮겨 봤다.
읽자 마자 다시 첫 장부터 또 읽게 되는 단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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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를 이끌어줄 최기진 선배 - 물론 가명이다 - 는 첫날이니 자기 소개를 할 필요가 있다며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밝히자고 했다.
"지금 시대에 맑스는 교양 아닌가요? 저는 교양 삼아 읽으러 나왔어요."
"저희 총학은 주사파인데 공부를 너무 안 시켜요. 계속 운동을 하려면 이렇게 무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왔습니다."
"철학 공부를 혼자서 쭉 해왔는데 그동안 관념론만 판 것 같아요. 유물론을 제대로 공부해 균형을 맞추고 싶습니다."
다들 청산유수다. 반쯤은 거리를 두는 심드렁한 태도로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어휘를 골라 말하는 것 같다. 차례가 오자 주영은 심사숙고 끝에 한마디만 했다.
"저는...... 맑스의 문장이 좋아서 왔어요."
이 무슨 '쁘띠' 같은 개소리란 말인가! '있어' 보이려다 가장 반동적인 동기를 고백하고 만 셈이다. 달리 보면 그 분위기에 가장 편승한 대답이기도 했다.
낯설고 긴장된 첫 모임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절반 정도 살펴보면서 시작했다. 이런 책을 두번 만에 끝낸다는 것에 주영은 압박감을 느꼈지만, 나경 언니와 미리 들춰본 덕분에 바보처럼 앉아 있지는 않았다. 이 책에서 주영이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부분은 맑스가 <자본론> 1권을 끝내고 엥겔스에게 편지를 보낸 대목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당신 덕분이었습니다. 나를 위한 당신의 자기 희생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세 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을 끝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꽉 찬 감사로 당신을 포옹합니다.
두장의 교정지를 동봉합니다.
15파운드는 매우 고맙게 받았습니다.
안녕, 내 사랑하는 친구여!]

스무살의 주영은 이런 종류의 편지에 마음이 울컥했다. 서른살에도, 마흔살에도 마찬가지였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미하일 조셴꼬가 첫 연금을 받고 문우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이 가난한 자의 작은 기쁨이 넘치는 글은 언제나 주영의 마음을 강타한다. 아마도 그 액수는 크지 않을 테지만 받은 사람은 그 돈을 바탕으로 다음 작업의 꿈을 꾼다. 엥겔스가 맑스에게 보낸 돈이야말로 <자본론>이 나오는 데 필요한 최소 자본이 아닌가. 돈을 화폐, 자본, 임금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주영에게 '15파운드' 같은 대목은 환산할 수 없는 금화처럼 빛났다.

"그나저나 맑스가 악필이라 취직을 못한 건 너무 재밌지 않아요?"
뒤풀이에서는 가벼운 대화들이 오갔다. 누군가 그 편지에 대해 언급을 하자 평생 맑스에게 헌신한 엥겔스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그러자 '정상인'이라는 독특한 가명-본명일 리 없으니까-을 밝힌 사람이 포스트잇에 적어놓은 자기의 메모를 읽어주었다.

'맑스의 생애에서 내 가슴을 울린 것은 위대한 책 한권이 나오기까지 맑스 가족이 겪은 일들이다. 그 가족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어머니는 울면서 남은 아이들과 죽어버리기를 바랐고, 책과 냉소 속으로 도망친 무어인(가족이 붙인 별명)은 동굴 같은 서재에서 자욱한 담배 연기와 함께 나날이 불어나는 사상, 나날이 불어나는 참고문헌과 자신의 완벽주의와 싸우고 있었다. 엥겔스가 보내주는 몇 파운드가 없었다면 진작 사라지고 말았을 이들의 필사적인 인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본론>은 맑스 가족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아이처럼 여겨진다......'

"와, 근사한데요."
주영은 솔직히 감탄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정에 대한 말이 오가는 동안 분위기가 다소 감상적으로 변했다.
"그들이 말한 것은 혁명이지만 내가 본 것은 우정이에요."

<정상인>, 김성중 (창작과 비평 2019 여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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