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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동 추억의 거리’는 어떤 곳일까. <향촌동 소야곡-조향래 作>이란 책은 이렇게 적고 있다. “…1950년대 대구 향촌동은 한국 문단의 중심지였다. 전란의 여파와 가난의 질곡에도 낭만이 있었고, 피폐와 절망 속에서도 술이 익고 음악이 흘렀다. 피란시절 향촌동은 우리 문화ㆍ예술의 요람이었다.…” 향촌동 골목의 탄생은 이렇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나면서 대구 중구 향촌동, 북성로 일대에 시인 박두진, 구상, 작곡가 김동진, 화가 이중섭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이 피난살이를 위해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작가들은 향촌동 일대에서 문학과 예술의 르네상스를 이루며 청춘을 불살랐다고. 그 흔적들이 남겨져 있는 곳이 바로 향촌동이다.
최근 대구 중구청은 이 거리를 ‘추억’이라는 테마가 있는 거리로 조성키로 했다. 현재는 현황판과 현판, 그리고 더러 남아있는 건물을 통해 예술인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가 출판된 꽃자리 다방, 전쟁 당시 외신들이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타전했다는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김광섭,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구상, 등 종군 문인들의 합숙소나 다름없었다는 감나무집(술집) 등 술집과 다방의 흔적을 구슬 꿰듯 하나씩 찾아 보는 것도 의미깊은 여행이 될 성 싶다. 대구 중구의 중앙네거리에서 대구역 네거리 방향으로 가다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향촌동이 나온다. 지금은 당시의 간판도, 사람들도 사라졌지만, 향촌동 골목 구석구석에는 그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주변에 경상감영공원이 있다.
이 기사를 언젠가 보고서 메모를 해 둔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 대구길에 제일 먼저 가 보고 싶어서 첫 날 찾았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다)
중앙의 가장 윗쪽 노란색 동그라미가 향촌동과 그 일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고, 그 시절을 주름잡던 '녹향 음악감상실'은 길 맞은 편 '한국영상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옮겨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영상 박물관 녹향에서 좀 더 왼쪽에 교동시장이 있는데, 부산의 깡통시장처럼 대구에서는 '도깨비 시장'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전쟁통에 밀수한 일본 물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거래되던 곳인데 서울의 남대문 시장처럼 지금도 없는 게 없어 보인다. 동동 구리무라는 화장품, 콜드 크림으로 불리던 엄마들의 영양 크림, 코티로 유명한 화장품 분냄새가 물씬 나서 괜히 기분이 편안해 지더라.
그리고 사진에서 보이는 향촌동 왼쪽으로 경상감영공원이 있고, 더 왼쪽 끝에 한국산업은행이 있는데 이 건물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지역 문화제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이다.
대구 극장 맞은 편, 대구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자리한 '녹향 음악실'
대구의 종로, 부산의 남포동이라 할 수 있어서 신시가지와 달라 낡은 흔적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없어질 위기에 처하다가 대구 중구청의 도움으로 영상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근근히 이어가고 있다.
입장료는 2천원이고 커피와 물 등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커피 자판기)
이 놈의 수전증. :-p
실내 풍경이다. 마치 그 시절 50년대 문인들이나 한 풍류하는 양반들, 신여성들이 바흐를 듣고 베토벤을 듣던 다방 느낌이 물씬 난다.
가장 먼저 나를 깨우고 들뜨게 하는 것은 '향기'.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가 나는데 불쾌하거나 꿉꿉한 기운 하나 없이 세월의 향기가 난다. 그 냄새...
파석으로 장식된 벽이 옛날 부잣집 양옥같다.
저 입구를 통해 들어온다.
달력은 2009년인데 마치 1974년의 시간 같다.
감상에 좋으라고 커텐을 쳐 두고 스탠드를 켜 둔 모양새가 드라마 속 같았다.
구순이 다 되어가는 이 어르신 혼자서 꾸려가신다. 이 어르신이 자녀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고 계시다.
자부심과 어른의 자태가 인자하고 꼿꼿하셨다.
다방 의자에 앉아 베토벤을 들었다.
어르신이 나온 기사 '음악 짝사랑 한평생, 팔순의 푸르른 향기'
녹향을 나와 이제 교동을 조금 걸었다.
교동 시장 입구
시장표 옷들이 한 무더기.
나도 앉아서 골라서 2천원 주고 유한마담 블라우스를 하나 구입. 크크
구 번화가라 시장과 쇼핑몰 등을 살리느라 도로 정비, 벤치 늘리기 등 상가에서는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당시 피난시절 번화가를 이뤘던 캬바레같은 건물들이 운치가 있었는데 그런 곳을 오히려 특화하면 어떨까.
골목 골목 끝이 없는 도깨비 시장.
길을 잃을 뻔 했는데 어디로 가든 통하는 게 길이라고 다시 중앙도로로 나왔다.
이제 향촌동 거리 일대를 가기 위해 중앙 대로를 건넌다.
맞은 편의 약국 건물이 군산에서 자주 보던 스타일이다.
이제는 흔적이 없어진 향촌동 거리. 가죽과 제화 거리가 되었다.
향촌하와이 나이트클럽. 향촌의 이름은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동네가 그렇다보니 향촌 주차장에서도 이름을 발견. 역시 제화점이 가득했다.
향촌 주차장 옆의 건물은 적산가옥이다.
부산 남포동, 자갈치 시장이나 군산에서 볼 수 있는 벽과 지붕
제화점들이 있는 거리 안 쪽으로 들어가면 '향촌동 예술의 거리'를 남기고자 하는 몇 몇 기념패들을 볼 수 있다.
음악감상실 '르네상스'를 기념하는 문패.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
미용실이 되었다가 이제는 완전히 폐업해 버렸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성인 나이트 클럽이 되었다. 조그맣게 르네상스 기념패가 보인다.
여기는 성인들의 장소인지 저 조용해 보이는 골목마다 소주집들과 요란한 뽕짝이 흘러 나오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당췌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낮부터 얼굴이 불커진 중년남녀들이 손을 붙잡고 지나다녔다.
작은 간판들
아직 그 때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 곳도 곧 개발되겠지..
골목은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고... 계속 이렇게 골목들을 따라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나온 공원. 경상감영공원. 규모가 꽤 컸다.
사람들도 많았다. 인사동처럼 어르신들이 모여서 장기를 두고 훈수를 두고 소일거리를 하셨다.
이렇게 공원 외곽을 따라 걸어서 다음 코스로 향했다.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 중 하나이다. 1918년 10월에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개를 합병해 설립되었으며 일본 제국의 식민지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중요한 축이 되었다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에서 자금 공급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중일 전쟁 이후로는 약 8년 동안의 전시 체제 속에서 채권 발행과 강제 저축을 통해 조선의 자금을 흡수하여 일본 정부와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산업 부문에 이를 공금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한국식산은행으로 개칭되었고, 한국식산은행은 1952년에 한국산업은행에 합병되었다." 고 한다.
" 2층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남측 도로인 서문로에 면하여 남향 배치되어 있다.남측과 서측의 출입구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 외관은 크게 상부와 하부의 재질을 다르게 함으로써 구성상의 다양성을 추구하였다.하부벽은 화강석 다듬돌을 쌓아 구성하였고 상부벽은 흰색 타일 붙임을 하여 구성하였다.도로에 면하는 남쪽과 서쪽의 창 사이의 벽은 돌출시켜 기둥처럼 만들고 건물 양 모서리와 각 기둥의 주두를 몰딩으로 장식하였다.기둥 위에는 나뭇잎 모양을 양각한 사각형의 부조 장식판을 붙였다.전체적으로 단순하게 처리한 정면부의 장식과 수평선을 강조한 지붕 슬라브의 처리 등을 통해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건물로 주위의 다른 건물과는 재료처리나 형식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내부 칸막이벽 마감재 등이 다소 바뀌긴 했으나 건물 전체의 형태는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최근 대구 중구청은 이 거리를 ‘추억’이라는 테마가 있는 거리로 조성키로 했다. 현재는 현황판과 현판, 그리고 더러 남아있는 건물을 통해 예술인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가 출판된 꽃자리 다방, 전쟁 당시 외신들이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타전했다는 르네상스 음악감상실, 김광섭,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구상, 등 종군 문인들의 합숙소나 다름없었다는 감나무집(술집) 등 술집과 다방의 흔적을 구슬 꿰듯 하나씩 찾아 보는 것도 의미깊은 여행이 될 성 싶다. 대구 중구의 중앙네거리에서 대구역 네거리 방향으로 가다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향촌동이 나온다. 지금은 당시의 간판도, 사람들도 사라졌지만, 향촌동 골목 구석구석에는 그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주변에 경상감영공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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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언젠가 보고서 메모를 해 둔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 대구길에 제일 먼저 가 보고 싶어서 첫 날 찾았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다)
중앙의 가장 윗쪽 노란색 동그라미가 향촌동과 그 일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고, 그 시절을 주름잡던 '녹향 음악감상실'은 길 맞은 편 '한국영상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옮겨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영상 박물관 녹향에서 좀 더 왼쪽에 교동시장이 있는데, 부산의 깡통시장처럼 대구에서는 '도깨비 시장'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전쟁통에 밀수한 일본 물건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거래되던 곳인데 서울의 남대문 시장처럼 지금도 없는 게 없어 보인다. 동동 구리무라는 화장품, 콜드 크림으로 불리던 엄마들의 영양 크림, 코티로 유명한 화장품 분냄새가 물씬 나서 괜히 기분이 편안해 지더라.
그리고 사진에서 보이는 향촌동 왼쪽으로 경상감영공원이 있고, 더 왼쪽 끝에 한국산업은행이 있는데 이 건물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지역 문화제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이다.
대구 극장 맞은 편, 대구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자리한 '녹향 음악실'
대구의 종로, 부산의 남포동이라 할 수 있어서 신시가지와 달라 낡은 흔적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없어질 위기에 처하다가 대구 중구청의 도움으로 영상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근근히 이어가고 있다.
입장료는 2천원이고 커피와 물 등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커피 자판기)
이 놈의 수전증. :-p
실내 풍경이다. 마치 그 시절 50년대 문인들이나 한 풍류하는 양반들, 신여성들이 바흐를 듣고 베토벤을 듣던 다방 느낌이 물씬 난다.
가장 먼저 나를 깨우고 들뜨게 하는 것은 '향기'.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가 나는데 불쾌하거나 꿉꿉한 기운 하나 없이 세월의 향기가 난다. 그 냄새...
파석으로 장식된 벽이 옛날 부잣집 양옥같다.
저 입구를 통해 들어온다.
달력은 2009년인데 마치 1974년의 시간 같다.
감상에 좋으라고 커텐을 쳐 두고 스탠드를 켜 둔 모양새가 드라마 속 같았다.
구순이 다 되어가는 이 어르신 혼자서 꾸려가신다. 이 어르신이 자녀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하고 계시다.
자부심과 어른의 자태가 인자하고 꼿꼿하셨다.
다방 의자에 앉아 베토벤을 들었다.
어르신이 나온 기사 '음악 짝사랑 한평생, 팔순의 푸르른 향기'
녹향을 나와 이제 교동을 조금 걸었다.
교동 시장 입구
시장표 옷들이 한 무더기.
나도 앉아서 골라서 2천원 주고 유한마담 블라우스를 하나 구입. 크크
구 번화가라 시장과 쇼핑몰 등을 살리느라 도로 정비, 벤치 늘리기 등 상가에서는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당시 피난시절 번화가를 이뤘던 캬바레같은 건물들이 운치가 있었는데 그런 곳을 오히려 특화하면 어떨까.
골목 골목 끝이 없는 도깨비 시장.
길을 잃을 뻔 했는데 어디로 가든 통하는 게 길이라고 다시 중앙도로로 나왔다.
이제 향촌동 거리 일대를 가기 위해 중앙 대로를 건넌다.
맞은 편의 약국 건물이 군산에서 자주 보던 스타일이다.
이제는 흔적이 없어진 향촌동 거리. 가죽과 제화 거리가 되었다.
향촌하와이 나이트클럽. 향촌의 이름은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동네가 그렇다보니 향촌 주차장에서도 이름을 발견. 역시 제화점이 가득했다.
향촌 주차장 옆의 건물은 적산가옥이다.
부산 남포동, 자갈치 시장이나 군산에서 볼 수 있는 벽과 지붕
제화점들이 있는 거리 안 쪽으로 들어가면 '향촌동 예술의 거리'를 남기고자 하는 몇 몇 기념패들을 볼 수 있다.
음악감상실 '르네상스'를 기념하는 문패.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
미용실이 되었다가 이제는 완전히 폐업해 버렸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성인 나이트 클럽이 되었다. 조그맣게 르네상스 기념패가 보인다.
여기는 성인들의 장소인지 저 조용해 보이는 골목마다 소주집들과 요란한 뽕짝이 흘러 나오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당췌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낮부터 얼굴이 불커진 중년남녀들이 손을 붙잡고 지나다녔다.
작은 간판들
아직 그 때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 곳도 곧 개발되겠지..
골목은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고... 계속 이렇게 골목들을 따라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나온 공원. 경상감영공원. 규모가 꽤 컸다.
사람들도 많았다. 인사동처럼 어르신들이 모여서 장기를 두고 훈수를 두고 소일거리를 하셨다.
이렇게 공원 외곽을 따라 걸어서 다음 코스로 향했다.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 중 하나이다. 1918년 10월에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개를 합병해 설립되었으며 일본 제국의 식민지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중요한 축이 되었다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에서 자금 공급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중일 전쟁 이후로는 약 8년 동안의 전시 체제 속에서 채권 발행과 강제 저축을 통해 조선의 자금을 흡수하여 일본 정부와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산업 부문에 이를 공금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한국식산은행으로 개칭되었고, 한국식산은행은 1952년에 한국산업은행에 합병되었다." 고 한다.
" 2층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남측 도로인 서문로에 면하여 남향 배치되어 있다.남측과 서측의 출입구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 외관은 크게 상부와 하부의 재질을 다르게 함으로써 구성상의 다양성을 추구하였다.하부벽은 화강석 다듬돌을 쌓아 구성하였고 상부벽은 흰색 타일 붙임을 하여 구성하였다.도로에 면하는 남쪽과 서쪽의 창 사이의 벽은 돌출시켜 기둥처럼 만들고 건물 양 모서리와 각 기둥의 주두를 몰딩으로 장식하였다.기둥 위에는 나뭇잎 모양을 양각한 사각형의 부조 장식판을 붙였다.전체적으로 단순하게 처리한 정면부의 장식과 수평선을 강조한 지붕 슬라브의 처리 등을 통해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건물로 주위의 다른 건물과는 재료처리나 형식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내부 칸막이벽 마감재 등이 다소 바뀌긴 했으나 건물 전체의 형태는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1931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된 2층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남측 도로인 서문로에 면하여 남향 배치되어 있다.
남측과 서측의 출입구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 외관은 크게 상부와 하부의 재질을 다르게 함으로써 구성상의 다양성을 추구하였다. 하부벽은 화강석 다듬돌을 쌓아 구성하였고 상부벽은 흰색 타일 붙임을 하여 구성하였다. 도로에 면하는 남쪽과 서쪽의 창 사이의 벽은 돌출시켜 기둥처럼 만들고 건물 양 모서리와 각 기둥의 주두를 몰딩으로 장식하였다. 기둥 위에는 나뭇잎 모양을 양각한 사각형의 부조 장식판을 붙였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게 처리한 정면부의 장식과 수평선을 강조한 지붕 슬라브의 처리 등을 통해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건물로 주위의 다른 건물과는 재료처리나 형식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내부 칸막이벽 마감재 등이 다소 바뀌긴 했으나 건물 전체의 형태는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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