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넙적하고 깊이가 좀 있는 그릇이 있었으면 더 폼난다!)
촌스럽게도 나는 중국집 메뉴 중에서 '누룽지탕'을 볼 때 마다 '누룽지 끓인 게 왜 저렇게 비싸?'라고 생각했다. 우리 아빠는 한껏 모양을 잡고 가족들에게 어깨를 세우고 싶을 때 마다 중국집엘 데려가셨다. 중국집엘 가는 동안 엄마한테 "막내 처남 집 근처로 가자. 거 인형이도 데리고 나오라고 해." 라고 하고선 꼭 같이 어울려 먹으면서 대접하고 나누는 걸 좋아하셨다.
근데 우리는 그 수 많은 세월 동안 중국집에 가서 팔보채, 유산슬, 짜장면(중에서 암튼 젤 비싼거)만 먹었었다. 그냥 그 세 개가 중국집 요리의 전부인 냥 그렇게 살았었다. :-)
왜냐하면 아빠 자신이 요리집에서 다른 것을 많이 못 드셔 보신 까닭에 팔보채, 유산슬, 그리고 짜장면이 제일 맛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탕수육 처럼 튀긴 음식은 일반 짜장면 집에서도 배달해서 시켜 먹을 수 있는 것이니 다른 좋은 걸 먹여 주신다고 늘 골라 주신 게 그것들이다. 그리고 식사로 짜장면을 시킬 때도 제일 좋은 걸 시키라고 하신다. 일반 짜장면이 먹고 싶은데도 하여간 젤 비싼 걸 우리가 시켜야 아빠가 좋아하셨다.
그래서 뭐,
나는 누룽지탕을 작년에야 처음 먹어 봤다는 그런 이야기다.
남자친구가 배달시켜 준 누룽지탕이었다.
(나는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정말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운 것 같다. 특히 누룽지탕..-_-)
헉!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소스를 붓는데 '치아악~ 챠작~' 뭐 이딴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미각과 청각!
이것은 바로 소리없는 아우성.. 공감각적 심상 ... - _ -;
암튼 그 때 나는 여럿이 둘러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내색은 못했지만 엄청나게 흥분해 있었고 처음 보는 누룽지탕을 조금 겁내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얼었단 얘기) 저것이 누룽지탕의 정체였구나.. 바로 저것이! 바로 저것이 정체!!
이제야 비밀이 풀렸다. 그래서 비쌌구나.. 해삼, 새우, 오징어 등등 팔보채에 들어가는 재료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 가격이었구나. 누룽지탕이란 저런 것이었군...
그리고 맛있더구만.
그 후 집에 다니러 갔을 때,
역시나 아빠는 우리를 대동하고 차에 태우고 자랑스러워하며 (가족 모두 싣고 차 운전하는 걸 좋아하신다.) 중국집으로 갔고, 막내 외숙모한테 갑작스레 전화해서 "5분 후에 도착하니까 같이 밥먹으러 가자구~ 모시러 갈테니 인형이 데리고 딱 앞에 나와 있어요~"하고 룰루 랄라..
그리고 팔보채와 유산슬을 먹고 있는데 (하여간 팔보채는 배 터지게 먹는다. 이 메뉴가 좀 식상해서 다른 것을 시켜 보려고 해도 모두들 겁이 나서 못 시켰던 것 같다 :-)
옆 테이블에서 "치지직, 챠작" 뭐 이딴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것이었다.
맛있고 흥을 돋구는 소리같이.
아빠가 물끄러미 보더니... "우리도 다음엔 저런 걸 먹어 보자"고 하셨다.
그 때 알았다.
아빠는 누룽지탕의 존재를 모르셨다는 걸.
그 때 은근히 남의 테이블을 호기심 가득히 유심히, 그리고 조금은 부러운 듯이, 또 저런 건 비싼 건가 하는 눈빛이 나에게 콱 박혔다.
난 누룽지탕 먹어 봤는데. 아빠는 그런 것도 모르고.
저거 배달시켜 먹기도 할 만큼 비싼 요리도 아니고 평범한 건데 아빠는 그런 것도 모르고.
훌쩍..
그 때 부터 누룽지탕이 마음 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원래 내가 좀 촌스럽다)
담에 가면 꼭 저거 시켜먹어야지.
내가 먹어봤는데 아빠는 그런 것도 몰라..하면 자존심 상해 하실 것 같고
안 먹어 봤다고 시치미를 뚝 떼고 새로운 것을 먹자고 해야지 결심했다.
그러다가 요리책에 나온 누룽지탕을 보니 집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더라.
아아
연습 좀 해서 집에 가거든 꼭 상에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얼마나 이게 해 보고 싶던지.
아마 반 년은 장 보러 갈 때 마다 이 생각을 했을거다.
그런데 정작 이거 하나 하려고 재료를 산다는 게 쉽지도 않았고,
장 보러 갈 시간도 안 났었다. 그 반 년 동안.. 인터넷으로 사는 건 싫었다.
꼭 손으로 사서, 차근 차근 다 연습해 보고 아빠 엄마한테 진수성찬으로 내놓고 싶은 마음.
(누룽지탕 한 메뉴로 진수성찬이라니 -;- )
맘 딱 먹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하나로 마트를 들렀다.
정말 피곤해서 집으로 가서 곧장 뻗고 싶었지만 그냥 갔다.
(설마 마트에서 드러눕겠냐 하면서;;)
누룽지탕.
정말 쉽더라.
진짜 쉽다.
한식의 국, 찌개 간 맞추는 것에 비하면 어휴 거저먹기다.
고추잡채도 고추기름에 파, 마늘 센 불에 30초 볶다가 고기 넣고 반 쯤 익었을 때 피망 넣고
굴소스 한 3큰술에 양조간장 식성대로 2~3 스푼 넣으면 끝이었다.
근데도 얼마나 맛있던지!
누룽지탕 역시 소스는 굴소스다.
레서피는 아래.
들어가는 재료는 일단 집에 있는 것들로 하면 되겠더라.
나는 괜히 기분내본답시고 새우도 샀다.
(중간 크기로 넉넉히 샀는데도 4천원이 안되었다.)
오징어는 집에 있었고.
목이버섯도 말려둔 것과 죽순 통조림을 샀다.
(목이버섯은 3,500원 쯤 했고 죽순 통조림도 2천 얼마였던 것 같다.)
엄마가 보내주신 표고 버섯이 있어서 요긴하게 썼다.
누룽지는 그냥 뜨거운 물 부어먹는 일반 누룽지로 했다.
(이게 더 맛있었다. 후라이팬에 기름 조금 조금 넉넉히 둘러 튀기듯 구웠는데
소스를 부었을 때 소리가 챠~악~ 나는 것이 똑같았다.
게다가 맛이 더 고소하고 좋았다. 중국 재료상에서 찹쌀 누룽지를 사러 가는 수고는 필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두꺼운 찹쌀 누룽지는 튀겨야 하는데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튀김도 거의 안 하는데 그 기름을 버리는 것도 찝찝하고.)
재료를 다 손질해서 한 곳에 놔 두는 것이 쉽게, 맛있는 음식을 하는 제 1 규칙인 것 같다.
(거의 정언명법임;;)
재료를 다 손질해서 쟁반 같은데 딱 놔두고 싱크를 대강 정리. 음식물 쓰레기도 모아두고.
나는 이상하게... 음식한다고 오직 그 음식을 완성하는 데만 온 관심을 쏟곤 했었다.
그리고 그걸 상에 올려서 먹으면서... 계속 남은 부엌일을 어서 빨리 마쳐야 한다고 조바심을 냈다.
즉 <재료 준비-요리-식사-설겆이 등 뒷정리>를 다 해야 100%인데,
그 중간에 식사를 하고 있으니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 같아 조금 전전긍긍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했다.
이제는 그래서 <재료 준비-싱크 한 번 정리-요리-식사>가 100%이다.
싱크가 정리되어 있으니까 식사 후에도 밥공기와 접시 하나, 국그릇 뿐이다.
그래서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식사도 더 느긋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 암튼 재료를 준비해 두고
2. 아주 살짝 매콤한 맛이 도는 누룽지탕을 하려고 (굴소스가 msg 덩어리라 좀 느끼하다)
고추기름에 마늘, 파를 센 불에서 30초 정도 볶다가
3. 채소류 넣고 1분 볶는다.
4. 해산물 넣고 볶는다. (오징어나 해산물은 조금만 많이 익혀도 질겨지기 때문에 채소 다음에)
5. 그리고 굴소스 1, 간장 1, 소금 쬐금, 후추, 청주 넣고 마지막으로 참기름 살짝 넣고 볶는다. (후다닥)
6. 이제 물(닭육수, 치킨스톡) 한 컵에 녹말가루 3스푼 정도 넣고 잘 흔들어서 그 위에 붓는다.
그럼 끝이다.
이거 약한 불로 해 두고 후라이팬에 누룽지를 구워서 (누룽지 튀겨 설탕뿌려 먹던 간식이 떠올랐음)
사기 그릇 같은 거에 담아서 상에 올려둠.
그리고 누룽지탕의 가장 큰 재미인 치지직 소리를 내기 위해 소스들을 따로 들고와서
상 위에서 합체!
(온도는 계속 뜨거운 정도로 맞춰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식으면 안됨)
맛있게 먹었다.
싹 비웠다.
마음도 개운하다.
누룽지탕은 나에게 각별한 음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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